내각제 꿈을 꾸는 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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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름다운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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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338112?sid=110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이 세계의 뉴스가 됐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주 ‘2200달러짜리 디올 손가방이 한국의 여당을 뒤흔들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영국 BBC방송과 더 타임스, 텔레그래프도 이 사안을 보도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국민이 걱정을 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한 뒤 여당과 대통령실 간에 불협화음이 있었다. 사과를 요구하는 민심에 윤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주목된다. 윤 대통령을 아끼는 지기(知己)가 대신 반성문을 써서 전해주려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제왕적 대통령의 시련에는 예외가 없는 것일까.



한국이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된 것은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의 고집 때문이었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열여섯 차례의 헌법 기초위원회 회의를 갖고 6월 21일 내각제 헌법 초안을 확정했다. 당대 최고의 헌법학자인 유진오가 주도했기에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 임기 동안 정부가 안정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며 대통령제로 바꾸자고 했다. 한민당 당수인 김성수가 동의했고,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인 김준연이 연필로 관련 조항 몇 대목을 고쳤다. 유진오는 “기형적 정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해서 다음 날 대통령제 헌법안이 본회의에 넘겨졌고, 7월 12일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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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제헌 과정은 오랜 시간 숙성 과정을 거쳤다. 1880년이 되자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열자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났다. 눈이 밝은 메이지 정부 최고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미 1871년부터 서양 헌법 서적을 입수해 연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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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는 1888년 총리에서 물러나 초대 추밀원 의장으로 제헌 작업에만 몰두했다. 이노우에 고와시가 만든 초안을 놓고 식사도 걸러가면서 밤늦게까지 토론했다. 젊은 관료들은 전직 수상의 의견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이토가 “자기 의견을 마음껏 말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889년 2월 11일 메이지 헌법이 공포됐다(『이토 히로부미』 이토 유키오).



두 나라가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이렇게 달랐다. 일본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한국은 거꾸로 심부름꾼인 공복(公僕)에게 전제군주의 지위를 부여하는 단초를 만들었다.


일본은 정교하게 설계된 입헌군주제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이토는 조선 병탄(倂呑)의 원흉이었고,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됐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영웅이었다. 반면에 한국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제로 고통받고 있다.



이 나라는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면 정부와 민간 기업, 범부(凡夫)의 일상까지 집단 몸살을 앓는다.


일류 기업과 한류의 파워로 국가 위상은 올라갔는데 언제까지 이런 전근대적인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악순환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정치권도, 국민도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건강한 권력구조를 만드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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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석현 일당은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민주당/민주진영 절대다수 의석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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