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바쳤어도 혐오를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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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요즘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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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당시 독일에 살던 60만 명의 유대인들은 독일을 자신들의 조국이라고 여기고 그런 독일을 지키기 위해서 10만 명이 독일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유대인 장병들 중 1만 2천 명이 전사했을 만큼, 유대인들은 독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며 용감하게 싸웠다.

 

 

하지만 1918년 1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독일인들은 그런 유대인들의 희생에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식의 유언비어를 지어내서 퍼뜨렸다.

 

"유대인들은 병역을 기피한 겁쟁이들이다!"

"유대인들이 독일을 배신해서 패배했다!"

 

 

이런 식으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유대인들한테 증오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는 1차 대전에 참전했던 군인인 히틀러도 있었는데, 히틀러는 1차 대전 도중에 자신한테 철십자 훈장을 추천해 준 상관인 후고 구트만이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1만 2천 명을 교수형에 처했다면 100만 명의 독일인이 살았을 것이다!"라고 선동했다. 

 

급기야 1938년 11월 9일 밤,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은 무차별적인 독일인들의 폭행에 얻어맞고 집이 불타며 재산이 약탈당하는 식의 테러인 '수정의 밤' 사태를 당했다.

 

 

 

아울러 이러한 독일인들의 유대인들의 증오는 결국 1939년 독일이 2차 대전을 일으키면서 아예 유럽에 사는 유대인 전체를 말살하려는 홀로코스트로 확대되게 된다. 홀로코스트에 희생당한 유대인들 중에서는 1차 대전 와중의 독일군 참전용사와 그 가족도 있었지만, 그들조차 학살을 피할 수 없었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해진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도 1차 대전에 참전했던 독일군 출신이었으나, 그와 그의 가족들도 나치 독일에 의해 유대인 말살수용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안네 프랑크는 죽임을 당했으며 오토 프랑크는 소련군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요약: 혐오와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는 아무리 개개인이 노력을 해도, 결코 처지가 나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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