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1957년에 저질렀던 하극상 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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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왕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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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월 박정희는 소장으로 진급하고 당시 6군단 부군단장으로 취임합니다. 당시 군단장은 백인엽 중장이었죠.

백인엽 중장은 자기 부하들을 인간 이하로 보고 갈구기로 유명한 똥별이었습니다. 

당시 박정희의 당번병인 박환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부대에 비상이 걸리면 박정희도 철모에 완전군장을 하고 대열의 선두에 섰는데. 

백인엽 군단장은 지휘봉으로 박정희의 철모를 탁탁 치면서 무슨 훈계 같은 걸 하곤 했고

박정희는 그렇게 갈굼당하면 과음하고 주정을 부려 당번병이 업고 숙소로 돌아오는 일들이 잦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장교가 계급순이라 하지만 제정신이면 아래 계급이라고 막 대하지는 않는데 백인엽은 인격이 개판이었던 겁니다.

박정희가 경력이나 나이나 백인엽보다 더 고참인데도 이랬죠. 


사실 백인엽은 이승만에게 잘 보여서 낙하산으로 6군단장을 했고, 군납비리로 6군단이 아사할 지경인데도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 참다 못한 박정희는 자기 부하들과 패거리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백인엽에게 반항하고 들이받는 하극상을 저질러서 6군단 전체가 뒤집어지게 됩니다.

1950년대 말이면 어느정도 군이 자리를 잡았는데 계급장 뗀 맞다이라니 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일인가...

그래서 참모총장인 백선엽의 중재로 1957년 9월 3일 제 7사단장으로 전보되어 강원도 인제로 갑니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이승만과 곽영주 등에게 미운털이 더 박혀버렸고 군사정변을 계획하기 시작하죠.

그 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얼마 후 백인엽은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을 받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나마 백선엽이 박정희 생명의 은인이라 백인엽은 10개월 만에 풀려나온 거지, 만약 그런 빽이 없었다면 곽영주처럼 죽여버리려 했죠.

아무튼 그렇게 형님빽으로 살아남은 백인엽은 이후 인천에서 선인제단이라고 동양 최대 사학재단울 운영하며 인천 교육 수준을 똥통으로 떨어트리는 데 큰 업적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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