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안나의 집’ 대표 김하종 신부 “코로나 걸리는 것보다 ‘안나의 집’ 650명 굶는게 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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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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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서 귀화 ‘푸른 눈의 신부님’

노숙인·가출청소년 돕는 시설 이끌어

“내가 확진땐 치료 받겠지만 급식 중단

사랑의 기적들이 하루하루 버티게 해줘”

“죽어서도 한국에 남고파” 지독한 한국사랑

공로인정 작년 2월 ‘국민훈장 동백장’에

지난 3일 찾은 경기 성남 안나의 집. 김하종( 63 ) 신부가 무료 급식 전, 자원봉사자들과 급식 준비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내가 쓰러질까봐 두렵다”, “ 600 명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할까 두렵다”, “내가 포기할까 두렵다…”

벽안(碧眼) 의 성직자를 만나고 오는 길 “두렵다”고 수차례 되내는 성직자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한동안 맴돌았다. 성직자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리며, 어릴 때 읽은 고전소설 하나가 함께 떠올랐다.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다. 소설은 낮은 곳에 임하는 프랜치스 치셤 신부와 함께 출세 지향적인 안센모 밀리 신부의 모습을 그려내며, 천국으로 가는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묻는다.

이 성직자와 소설 속 치셤의 모습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30 년째 이역만리 타향에서 성직 생활을 하고 있는 성직자와 중국 저장성의 벽지 파이탄에서 36 년 동안 머문 치섬. 바이러스의 전파의 위험을 무릎쓰고 노숙인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는 성직자와 전염의 위험을 무릅쓴 채 환자와 ‘코를 맞대고’ 흑사병과 싸워낸 치섬. 애써지은 성당이 홍수로 무너져 다시 세운 소설 속 이야기와 벽안의 성직자가 만든 노숙인 시설이 문을 닫을 위기를 겪은 것까지 비슷하다.

이탈리아가 고향으로 빈첸시오 보르도라는 이름을 버리고 한국에서 한국이름으로 살고 있는 김하종( 63 ) 신부를 만났다. 신부가 대표로 있는 경기 성남의 사회복지법인 ‘안나의 집’에서다. 안나의 집은 노숙인, 가출 청소년, 불우 아동 등을 돕는 시설이다.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매일 힘들지만 기적이 하루하루 이끌어”=안나의 집을 찾은 지난 3일 오후 1시. 주황색 앞치마를 두른 김 신부가 지하 1층에 있는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나의 집 지하 1층은 원래 노숙인들을 위한 식당으로 쓰였다. 이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으로 식당에서는 밥을 먹지 못한다. 대신 650 개가 넘는 도시락을 싼다. 신부와 자원봉사자들이 그 일을 하고 있다.

식당홀에 둘러 선 김 신부와 자원봉사자들은 “코로나 19 극복을 청하는 기도문을 함께 읽은 후, ‘자 이제 일합시다!’라는 김 신부의 말을 신호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홀 한켠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자와 눈을 마주친 신부는 “오늘은 봉사하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제가 잠시 빠져도 되겠다. 인터뷰하러 가자”라고 했다.

2층 사무실, 볕이 드는 방에서 마주한 김 신부는 지쳐보였다.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매일 힘들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강도 높은 노동에 따른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코로나 19 감염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이다. 병 자체에서 오는 고통이 아니라 김 신부가 쓰러져, 노숙인에 대한 급식이 중단되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김 신부는 “내일도 건강히 일어나 다시 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를 올린다고 했다.

“제가 코로나 19 에 걸리면 안나의 집은 중단된다. 나는 신부다.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안나의 집이 폐쇄되면 노숙인 650 명은 끼니를 거르게 된다. 아프리카에 있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만 굶주리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도 가난으로 하루에 한끼를 먹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지난 9월 12 일에는 열이 40 도가 넘어 구급차에 실려갔다. 곧바로 코로나 19 검사를 받았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틀 동안 자가 격리 됐다. 다행히 ‘음성’이었다.

코로나 19 가 창궐하기 시작한 올해 2월에도 위기가 있었다. 급식소들이 차례로 폐쇄되고, 안나의 집도 문을 닫아야 되는 상황이 됐다. 김 신부는 “공무원들을 만나 ‘중단하지 못한다’고 했다”며 “ 20 년이 넘게 안나의 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내 가족이다. 공무원들에게 ‘어려운 시기에 그들을 어떻게 버리냐’고 호소했다”고 말했다. 결국 안나의 집은 급식대신 ‘도시락’을 나눠주는 것으로 운영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도시락 배식을 돕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 배식 2시간전에 ‘감염 위험’으로 봉사활동을 취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얼마전 일이다. 어느 회사에서 직원들이 오후 1시부터 봉사하기로 했다. 20 명이었다. 11 시 반에 전화가 왔다. 죄송하지만 오늘 봉사 못가게 됐으며, 일부 직원이 코로나 감염에 무서워 한다고 했다. 예, 알겠습니다하고 끝났지만 막막했다.”

포기하고 싶은 날의 연속이지만 ‘기적’들이 하루하루를 이어갈 수 있게 해준다고 김 신부는 말했다.

“코로나 19 감염의 위험을 무릎 쓰고, 여전히 도움에 나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이건 기적이다. 사랑의 힘이다. 코로나 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아니라, 사랑의 팬데믹이 시작된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말을 이어가던 신부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내 기자에게 보여줬다. 구겨진 5만원짜리 2장이다. “방금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다가오더니, 저한테 이걸 쥐어줬다”며 “아무말도 안하시고 손에만 쥐어주고 뒤돌아 갔다. 기적이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장 기쁠때는 ‘노숙인의 재활’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한다.

“최근 3년 동안 안나의 집에서 살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빚 다 갚고, 1500 만원을 모아서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보람된 일이다. 일을 구하지 못하거나 돈이 없어서 노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적인 문제, 사회성, 문제 육체적 문제 등이 모두 겹쳐진 것이다.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을 다시 재활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타고르에서 김대건까지…호기심 많던 어린아이, 신부가 돼 한국을 찾다”=김 신부는 이탈리아의 피안사노 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2남 1녀 중 장남이다. 아버지는 수년전 돌아가셨다. 현재 85 세의 노모와 교사가 된 여동생, 아버지를 이어 농부가 된 남동생이 고향에 있다.

고등학생이었던 김 신부가 성직자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김 신부의 아버지는 “니 삶이니 잘 생각해보라”는 말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 신부는 신학대학에 진학한 뒤,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네 앞에서는 그랬지만, 뒤돌아서서 많이 우셨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의 얘기를 하자 김 신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김 신부는 그동안 2년에 한 번씩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갔다.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19 로 못가고 있다. 가족을 3년째 못보고 있는 상황이다. 어머니와는 매일 영상통화를 한다고 한다. 김 신부는 “코로나 때문에 너무 불안한 상황인데, 어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너무 미안한다”고 했다.

신부를 한국으로 이끈 건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선물 받은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시집이었다. 이후 로마 우르바니아나대에서 신학과 함께 동양철학을 전공했고, 그레고리오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신학대학을 다닐 때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책이름을 알 수 없는 책을 한 권씩 나눠줬다. 너무 좋았고 우리 모두 감동 받았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우리는 불교, 유교, 흰두교 등 서로 다른 책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며 한국의 천주교 전래사를 공부했다. 그러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접하면서, 한국을 택하게 됐다. 김 신부의 성(姓)도 김대건 신부의 것을 딴 것이다.

김 신부는 1990 년 5월 12 일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한국어는 서강대 한국어교육원에서 배웠다. 성남을 택한 것은 그곳이 가난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성남 신흥동성당 보좌신부로 일하면서, 상대원동 달동네 일대에 봉사활동을 했다. 소년소녀 가장의 집을 방문해 공부방을 운영했다. 독거노인을 상대로 무료 급식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1998 년 노숙인급식소를 설립했다. 노숙인급식소는 안나의 집이 됐다.

김 신부는 귀화한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된 이유를 묻자 “사랑”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김 신부는 지갑 속에서 장기기증 서약서를 꺼내 보인다.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다. 사랑하면 그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고, 끝까지 가고 싶다. 그와 같은 것이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돼 시신기증과 장기기증 서약서도 썼다. 나는 한국에서 죽을 것이다. 죽고 나서도, 한국에 재가 뿌려지길 희망한다.”

귀화는 쉽지 않았다. 두차례에 걸쳐 일반귀화를 신청했지만 심사에서 탈락했다. 귀화 규정은 한국인과 결혼했거나 한국에서 사업하는 사람에게 유리했지만 사제에게는 높은 벽과 같았다. 김 신부는 2015 년에야 귀화에 성공했다. 특별귀화를 통해서다. 특별귀화는 대한민국에 공로가 있는 것으로 정부가 인정한 외국인이 대상이 된다. 20 년 넘게 이어온 봉사활동을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지난해 2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다.

30 년간 한국에 살며 지켜본 한국인의 강점에 대해 물었다. “공동체 의식”이라고 답했다. 한국이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방역이 잘 되고 있는 점도, 공동체 의식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 대한민국은 초기에 확진자수가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나라였다. 정부의 말, 전문가의 말 따라갔다. 하나가 된 것이다. 유럽은 다르다. 정부에서 뭘 하자고 하면 ‘당신이 뭔데 그래’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이 방역에 성공하고 있는 건 공동체 의식 때문이다.”

▶“천국의 열쇠…흰두교든, 불교든, 유교든”=1시간 가량 진행된 인터뷰가 끝이 났다. 말미에 김 신부는 기자에게 “기사에 내 사진이 크게 부각되는 사진 말고,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봉사하는 사진을 실어달라”고 말했다. ‘하느님의 종’인 본인보다, “낮은 곳에서 임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이 드러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인터뷰에 응해줘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기자는 신부에게 “안나의집 이나, 성당, 교회를 가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며, “그 공간에서 ‘남’을 생각하는 그 순간은 적어도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해한다”라는 말과 함께 신부의 환한 웃음이 돌아왔다. 1층 마당으로 이어진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자, 비스듬히 비친 햇살이 마당에 고여 있다. 체온체크를 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의 밝은 표정도 김 신부의 표정을 닮아 있다.

이날 신부의 미소와 “두렵다”는 그의 말은 한동안 기자의 머릿속에 남았다. 집으로 들어가 먼지쌓인 ‘천국의 열쇠’를 책장에서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김 신부의 모습과 최근 이른바 언행 불일치의 행동으로 논란이 된 한 종교인이 함께 떠올랐다.

천국의 열쇠를 빠르게 넘기다 치섬이 말한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불교도든 회교도든, 또한 도교를 믿든 선교사를 죽인 후 그 고기를 먹어 버렸다는 식인종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부끄럽지 않게끔 성실히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치섬의 말은 김 신부의 말과 닮아 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16&aid=0001764625


인간극장에서 봤던것 같은데 ,, 대단한 분이죠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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