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썰롯 써(សាឡុត ស)
서양식 고등교육을 시키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49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
파리에서 공산주의와 스탈린주의를 접하고 완전히 매료되버려
캄보디아로 돌아온 후에도 공산당에 가입함
외세를 몰아내려는 공산당 조직 크메르 루주(ខ្មែរក្រហម)를 만들어서 무력투쟁을 했는데
마침 베트남전쟁으로 미군이 캄보디아에도 무차별 폭격을 퍼부어 수많은 사람을 죽이자
크메르 루주에 동참하는 국민들은 엄청나게 불어났고 민중들의 지지를 얻게 됨
불어 Politique potentielle(Political potential)에서 앞글자씩을 따와
Pol Pot(폴 포트)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던 그는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켜 캄보디아의 지배자가 됨
폴 포트 정권에서 지식인으로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붙잡혀 온 아이들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과 발을 사슬로 묶어놓았다.
중국 마오쩌둥 사상을 신봉하던 폴 포트는 가장 먼저 모든 도시인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킨 뒤 농사를 짓게 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모조리 다 죽이라고 명령했다. 안경만 써도 지식인, 반동분자로 몰려 강제 수용소로 끌려와 종일 막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지옥 같은 고문에 수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아무 생각하지 마라. 하는 말에 1초도 안 걸려서 무작정 답해라. 뭔가 생각하거나 답변이 늦는다면 그것은 위험한 요소이다'라면서 대답이 늦는 것만으로도 채찍질에서부터 온갖 고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서 아이들은 국가가 키우며 부모는 아이들과 떨어져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교육 방식으로 부모와 자식들을 강제로 생이별시키며 민중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농민 이외에는 모두 다 가짜라고 생각했던 크메르 루주는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중산층보다 잘 사는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해야 할 대상이었다. 또한 손을 보고 손바닥에 못이 배기지 않아 손이 부드러운 사람들은 무조건 부르주아로 몰아서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도 학살했다. 농민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며 죽이는 일도 있었으며,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국제적인 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를 2천 명이나 학살하기도 했다.
임산부가 갓 낳은 아기를 나무에 패대기쳐서 죽이는 크메르 루주
크메르 루주들은 드릴같이 생긴 도구로 뒤통수를 뚫거나 디딜방아처럼 생긴 도구에다 머리를 찧어 죽이는 방법으로 고문을 가했다. 증언에 따르면 고압선을 이용한 전기충격과 물고문은 물론 사람을 고문 침대에 뉘어 놓고 쇳덩어리로 머리를 짓누르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도끼로 손을 자르거나 유방이나 성기 등 인체의 예민한 부분을 예리한 칼 등으로 도려내기도 했다. 반동분자를 산속 나무에 묶어 이 나무를 오르내리며 먹이를 찾고 있는 무서운 열대 붉은왕개미들로 하여금 살을 파먹도록 하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는 반동분자들의 씨를 말린다면서 잡힌사람의 3대를 모조리 다 말살해버렸는데 심지어 젖먹이 아이들까지 살해했다. 또한 아이들이 훗날 보복할 수 있으므로 이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다. 죽인 방식도 잔인하기 짝이 없는데 갓난아이들이나 애들을 마치 개구리를 잡아 길바닥에 패대기쳐 죽이듯 팔이나 다리를 잡고 몸뚱이를 바위나 시멘트 바닥 또는 통나무 등에 내려쳐 죽였으며 심지어 마을에 스피커를 달아서 온 마을 사람들이 희생자가 사망하는 소리를 듣게 했다.
또한 갓난아이를 공중으로 던져서 사격연습용으로 이용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손톱을 뽑거나, 여자의 젖꼭지를 도려내기도 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구덩이에 사람들을 생매장시키거나 사람들을 우물에 넣어버리기도 했다. 아이들을 나무에 패대기 쳐 죽이면서 나무에 스피커를 달고 혁명가를 틀어서 비명소리를 덮었다는 이야기, 뾰족한 가시가 많은 설탕나무로 사람을 매질해서 죽였다는 증언들도 쏟아져 나왔다.
크메르 루주의 가장 악명높은 수용소로는 S-21 보안감옥인 뚜올 슬렝이 있는데 평범한 고등학교였으나 폴 포트 집권 후 고문소와 수용소로 개조되어 약 1만 7천명이 이곳에 수용되었으며 살아서 나간 사람은 12명에 불과하다.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미 국방성은 120만명, 예일대의 조사에서는 17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캄보디아의 인구가 700만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인적자원의 손실이다. 그리고 사실상 고등 교육 이상을 받은 국민들이 모조리 다 말살당하며 중국의 문화대혁명처럼 캄보디아 교육에 크나큰 '단절'을 가져왔다. 지금도 캄보디아 30~40대 교사들 가운데는 "과학 실험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모든 국민들은 검정색의 옷만을 입어야 했고 무엇을 먹고, 언제 잠을 자며, 어디에서 살고, 심지어 누구와 결혼할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고 오직 국가만이 정할 수 있었다. 결혼식은 최소 10쌍을 모아서 정부 기관 주관으로 합동 결혼식 형태로 치뤄졌다. 또한 보통 일주일에 두 번씩 열리는 생활 모임 시간엔 자아비판이 강요되었는데, 각자 자신이 잘못한 일과 최근에 한 활동을 공개적으로 자백했다. 이 자아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상호 감시와 잘못에 대한 고발이였기 때문에 서로를 계속 경계하고 의심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했다.
권력을 잃고 몰락한 말년의 폴 포트
한편 이웃나라 베트남을 누구보다 증오했던 폴 포트는 "베트남 놈들을 정글 속 원숭이들처럼 깩깩거리며 죽게 하라"며 캄보디아 내 베트남 사람들도 모조리 잡아들여 고문하고 학살하여, 이제 막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베트남을 자극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베트남을 선제 공격하도록 지시하여 국경지대 베트남 마을들을 박살내고 베트남 양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그리고 이것이 폴 포트의 몰락을 가져왔다.
분노한 베트남의 반격으로 1979년 크메르 루주는 몰락하여 쫓겨났다. 폴 포트는 크메르 루주를 이끌고 밀림으로 숨어들어 게릴라 저항을 계속했다. 미국은 베트남을 무너뜨리고자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고, 미국의 이같은 개입은 지금까지도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정글로 도망친 폴 포트는 공식적으로 총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계속 막후에서 활동했고 결국 이로 인하여 크메르 루주들 사이에도 내분이 심화됐다. 결국 1997년 부하들의 배신으로 체포된 폴 포트는 모든 힘을 잃고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폴 포트는 산 중턱에 있는 집에 연금되었는데, 이미 심각한 심장병과 고혈압을 앓고 있는 데다 암에 걸린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죄를 후회하지 않았고 죽기 전에 했던 인터뷰에서조차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했다. 그는 "나는 투쟁을 수행했을 뿐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니다'' 라며 "나를 보라, 내가 야만인으로 보이는가. 아직 나의 정신은 말짱하다"고 말했으며 "75~78년의 통치 기간중 우리의 운동이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이는 베트남 침공으로부터 캄보디아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나는 투쟁을 수행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게다가 폴 포트는 악명 높았던 강제수용소 '뚜올 슬렝'을 물어 보자 그 고문소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인'했으며 대량 학살은 모두 베트남 측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말하며 뻔뻔스럽게 책임을 회피했다.
1998년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폴 포트를 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해 재판을 받게 할 방침을 밝혔다. 폴 포트는 퍽 쇠약해 있었지만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구금장소 이동을 하루 앞둔 날, 심장마비로 급사해버렸다. 그러나 당시 정황이 석연치가 않아 온갖 반인륜적 범죄의 책임을 전부 폴 포트에게 떠넘기려던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의해 살해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많은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폴 포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옛 지도자와 연루될까 두려워 모른체 했다. 옛 부하들은 외딴 시골에 폴 포트의 시체를 들고 가 가족들과 옛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찌어가 보는 앞에서 폐타이어, 쓰레기와 함께 화장시켜 버렸다.
폴 포트의 마지막 최후
크메르 루주의 남은 추종자들은 아직도 숨어서 잔당이 완전히 소탕되지 못한 상태. 폴 포트 사망이후 체포된 크메르 루주들은 아직까지도 재판을 받고 있음
프랑스에는 지금도 폴 포트의 친동생과 여러 친척들이 살고 있음. 폴 포트의 광기에 경악하여 프랑스로 도망친 사람들. 폴 포트의 형은 동생의 만행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
박정희의 오른팔이었던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10.26 사건 당시 폴 포트 정권의 사례를 언급하며 "우리도 저렇게 수백만명 죽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이는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김재규가 증언한 바 있음.
영국의 테너가수 폴 포츠는 하필 이름이 비슷해 외국에서도 간간히 조크로 엮이곤 하는데 폴 포츠는 폴 포트를 '매우' 증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