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스캘링엔 반도 해변에서, 소년병들은 지뢰를 찾고, 분해하고, 옮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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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맥가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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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나치 독일은 덴마크와 맺은 상호 불가침 조약을 깨고 덴마크를 침공한다. 노르웨이 점령을 위해서는 먼저 덴마크를 손에 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중립을 유지하던 약소국 덴마크는 나치 독일과의 전면전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침공 개시 4시간 만에 나치 독일의 요구 조건을 수용해 나치 독일의 보호령이 되었다. 나치 독일은 연합군의 상륙을 막겠다며 덴마크 해안에 대서양 방벽 요새를 쌓았고, 덴마크의 해안선을 따라 지뢰 220만개를 매설했다. 220만개라니, 지뢰를 묻은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나면 누군가는 그걸 걷어내야 할텐데, 그 많은 지뢰를 어떻게 다 제거할 요량이었을까? 하긴, 아마 자신들이 걷어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리라. 그랬으니 220만개라는 절망적인 숫자의 지뢰를 매설한 거겠지. 연합군이 상륙하지 않은 채 전쟁이 끝난다면 다른 이들을 시켜서 걷어내게 하면 그만이라 생각했겠지. 이를테면 덴마크인이라거나, 나치 독일이 그렇게 절멸시키고 싶어했던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들이라거나.


지뢰 매설을 결정한 자들의 계산과는 달리 연합군은 덴마크 쪽이 아니라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으로 바로 상륙하는 쪽을 택했고,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며 나치 독일이 매설한 지뢰 220만개는 고스란히 덴마크 해안에 남았다. 덴마크는 일찌감치 항복한 덕에 나치 독일에 의해 입은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으니, 전쟁포로들에 대한 처우도 너그럽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았다. 전쟁과 점령으로 인한 악감정이라는 게 꼭 실질적인 피해가 커야만 생기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덴마크의 뒤에는 나치 독일과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연합군 영국이 있었다. ‘악의 제국’ 나치 독일의 만행에 화가 난 영국과 덴마크는 독일군 전쟁포로들에게 지뢰 제거를 맡긴다. 물론 제네바 조약에 따르면 전쟁포로에게 극심한 노동이나 위험한 작업을 시켜서는 안된다. 하지만 영국과 덴마크는 그 조약을 우회할 기가 막힌 방법을 찾아낸다. 이들을 ‘전쟁포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투항한 적군 인원’이라고 부름으로써, ‘전쟁포로’가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자발적으로’ 투항한 적군 인원들은 이제 ‘자발적으로’ 자국이 묻은 지뢰를 제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지뢰를 매설한 사람들이 지뢰를 제거하는 건 일견 이치에 맞는 일처럼 보인다. 일을 벌인 쪽에서 수습하는 게 맞지.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덴마크를 점령하고 지뢰 매설을 결정한 나치 독일의 수뇌부들이 뉘렌베르크에서 전범재판을 받는 동안, 지뢰를 걷어내는 실무의 대부분은 강제로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하게 된 소년병들의 몫이 되었다. 누군가는 그 소년병들 또한 대부분 히틀러 유겐트 출신이니 어리다고 해서 무고한 이들이 아니라 말하겠지만, 히틀러 유겐트 가입은 1936년 이후부터는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전쟁 말엽에는 히틀러 유겐트 내 14세 이하 소년들까지도 마구잡이로 차출되어 전선으로 보내졌다. 대부분 억지로 등 떠밀려 전쟁에 나오게 된 아이들이다. 덴마크의 해안을 지뢰로 도배하자는 결정을 내린 노인들이 아니라, 그 결정을 내리는데 조금의 책임도 없었던 어린 소년들이 지뢰를 제거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렇다 할 지뢰탐지기도 없이, 5cm 간격으로 대검을 땅에 45도 각도로 찔러 넣어가면서.


덴마크와 독일의 합작 영화 〈랜드 오브 마인〉(2015)은 지뢰찾기에 투입된 소년병들과, 그들의 지휘 통솔을 맡은 덴마크 육군 상사 칼 라스무센(롤란 묄레르)의 이야기를 다룬다. 칼은 나치 독일을 향한 증오와 분노로 가득한 사람이다. 그렇게 큰 미움이 마음 안에 있으니, 제 밑으로 배속된 소년병 포로들을 대할 때에도 칼은 망설임이 없다. 나치 독일군은 전쟁범죄자들이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고, 아무리 어려도 나치는 나치다. 덴마크 군도 어쩌면 그래서 이 위험천만한 죽음의 임무를 칼에게 맡긴 건지도 모른다. 피도 눈물도 없이 포로들의 등을 떠 밀 사람이 필요해서. 칼은 1차로 배속된 10명의 소년병들에게 스캘링엔 반도에 묻힌 지뢰를 3개월 안에 다 제거하면 집으로 돌려 보내주겠노라 말한다. 스캘링엔 반도 해안선에 묻힌 지뢰의 갯수는 약 4만 5천개. 한달에 1만 5천개, 하루에 500개, 한 사람 당 하루 50개… 가능해 보이지 않은 미션 앞에서 소년병들은 절망한다. 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으니, 소년병들은 목숨을 걸고 모래사장 위에 엎드려 지뢰를 찾는다.


하늘은 파랗고, 바다도 푸르고, 모래는 거짓말처럼 곱고 하얀 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스캘링엔 반도 해변에서, 소년병들은 지뢰를 찾고, 분해하고, 옮기고… 그러다가 이따금 지뢰가 터지면 팔다리를 잃거나 목숨을 잃는다. 독일로 돌아가면 정비공이 되고 싶다던 낙천적인 성격의 빌헬름(레온 지델)은, 굶주림과 일사병에 시달리다가 그만 지뢰 위에 구토를 하고, 지뢰가 작동한 탓에 두 팔을 잃고 울부짖는다. 머리 회전이 좋고 실행력이 좋던 베르너(오스카 벨튼)는, 대전차지뢰가 이중으로 매설된 줄 모르고 친구들의 경고도 미처 듣지 못한 탓에 그 자리에서 시체조차 찾아볼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해변의 고요한 평화와, 그 적막을 파괴하는 지뢰의 폭발의 잔혹한 대비. 엄마를 찾으며 오열하는 소년병들을 보며 칼은 서서히 깨닫는다. 얘네, 그냥 아이들이었구나. 쉽게 겁에 질리고, 아프면 엄마를 찾는. 칼은 제대로 된 식사도 제공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소년병들을 위해 식량을 챙기고, 지뢰 제거가 끝난 구간에서 소년병들과 축구를 하며 조금씩 마음을 연다. 하지만 칼이 마음을 여는 것과 별개로 소년병들은 지뢰를 제거하다가 하나둘씩 죽어 나가고, 덴마크 군은 살아남은 소년병들을 다시 다른 지뢰 매설 지대로 보낼 계획을 세운다. 전쟁을 결정한 어른들의 죄를, 아이들이 죽음으로 대속한다.


〈랜드 오브 마인〉을 다시 떠올린 까닭은 가자지구 교육부가 발표한 성명 때문이었다. “학생 대부분의 사망으로 인해 올해 수업기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래로 지금까지 가자지구에서만 1만 22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는 2만 5천 400여명에 달한다. 개중 어린이는 4,104명 사망, 8천여명 부상, 잔해에 깔린 것으로 추정되는 실종자는 1,200여명이다. (2023년 11월 6일 기준) UN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는 “10분마다 어린이 1명이 죽고, 2명이 다치고 있다”고 말한다. 죽음이 일상화된 곳, 가자지구의 아이들은 손바닥이나 팔뚝에 펜으로 제 이름을 적어넣고 있다. 혹시나 공습으로 인해 자신이 사망했을 때 신원을 알아보기 어려울까봐.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이스라엘은 기자들을 불러모아 하마스 무장반군이 얼마나 잔혹하게 자국민을 살해했는지 기록한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 전쟁을 여기서 멈출 수 없다고 강변하는 중이다. 전쟁을 일으킨 건 어른들이고, 각종 명분을 들어 전쟁을 계속 하고 있는 것도 어른들인데, 그 대가로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마치, 스캘링엔 반도 해변에서 〈랜드 오브 마인〉 속 소년병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이들은 이 전쟁은 2023년 10월 7일에 하마스의 공격으로 인해 발발한 것이라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 이후 75만여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강제로 고향에서 쫓겨난 사건인 ‘나크바(대재난)’에서 시작된 전쟁이 아직 안 끝난 것이라 말한다. 이 두 입장은 단순한 입장 차이가 아니라 세계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기에, 어지간해서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사람이라면, 이토록 많은 어린아이들이 죽고 다치고 실종되는 비극은 그만 끝나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른들의 전쟁 때문에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참극의 반복을 언제까지 계속할 참인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가자인구의 절반은 어린아이들이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더 많은 어린아이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난 숨 막히게 아름다운 스캘링엔 반도 해변에서 죽어갔던 독일군 소년병들을 생각한다. 나치를 죽일 듯이 미워했고 그럴 만한 명분도 있었으면서도, 끝내 소년병들을 외면하지는 못했던 덴마크군 상사 칼을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방어할 권리가 있다”라거나 “저들이 먼저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같은 말들이 허망하게 허공에서 부딪히는 동안, 10분에 한 명씩 죽어나갈 가자지구의 어린아이들을 생각한다. 그 아이들의 손바닥과 팔뚝에 적힌 이름들을 생각한다. 어른들의 죄를 아이들의 피로 갚는 이 역사는, 지금 당장 여기서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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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씨네플레이 칼럼은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을 다뤄 봤습니다. 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꺼낸 영화 맞습니다. 누가 먼저 이 싸움을 시작했는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따지기 이전에, 일단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것에는 다들 동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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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링크: https://blog.naver.com/cine_play/223259337362


〈랜드 오브 마인〉 어른들의 죄로 피흘리는 아이들

씨네플레이 | 우린 같은 걸 본 걸까




지금 이스라엘의 폭격과 대학살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인종주의의 위험도 커지고 있다. 물론 지금 가장 위험한 것은 백인우월주의와 아랍인,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인종주의이다.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는 서구 사회들에서는 어느 정도의 기본값이어서 쉽게 사라지지도 않고, 보이지 않게 계속 작동하고 있다. 


3주만에 벌써 가자지구에서 3천명이 훌쩍 넘는 아이들이 죽었지만, 서방 정부와 언론이 그것을 외면하거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은 인종주의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은 미국, 유럽, 이스라엘에서 테러 등으로 시민과 아이들이 죽었을 때 이들이 보여 온 커다란 슬픔이나 분노와 비교돼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것은 아랍인, 무슬림, 유색인의 생명은 같은 값어치를 가지지 않는다는 속마음의 드러냄이 아닐 수 없다. 생명의 죽음에도 얼마만큼 슬퍼하고 분노할지 서로 다른 등급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서방 정부와 언론들은 이스라엘의 폭격과 학살뿐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문제였다는 모든 비판을 '반유대주의'라고 낙인찍어서 입을 막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 노동당의 좌파 지도자 제레미 코빈이 그런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돼 왔다. 코빈은 급진적 좌파로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과 점령을 비판했을 뿐인데, 영국의 권력자들은 그것에 '반유대주의'라는 낙인을 찍고 누명을 씌워서 고립시키고 마녀사냥한 것이다. 


그런 권력자들이야말로 영국에서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주도해왔다는 점에서 더 기막힌 적반하장의 공격의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한국의 극우적 지배자들이 그 반대 진영에 있는 사람들에게 '반일 종족주의'라는 낙인을 찍어서 매도하고 공격하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서 봐야 할 것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한 비판, 일본의 식민지배와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부적절한 인종주의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진보좌파 쪽의 일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은 '유대인'을 비난하거나 아예 '탐욕스럽고 교활한 유대인들이 유대금융자본과 로비를 통해 미국과 세계를 조종한다'는 식의 인종주의적 접근을 택한다. 아무리 그 심정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은 옳은 태도가 아닌데, 그 이유는 몇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이런 태도는 '심지어 좌파조차도 반유대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며 시온주의 우파들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한다. 둘째, '반유대주의'를 빌미로 좌파를 탄압하고 억압을 강화하려는 시도에 근거를 제공해 준다. 


셋째, 무엇보다도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것도, 이스라엘이 지금 저러는 것도 유대인의 인종적 특성과 아무 상관이 없다. 두 가지 모두 자본주의적 이윤과 제국주의적 패권이 그것을 필요로 했다. 


폭격과 학살이 유대인들의 인종적 특성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 미국에서 그것을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박노자 교수도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해 왔다. 반유대주의적 접근은 이런 이들에게 용기가 아니라 상처를 줄 뿐이다.  


홀로코스트 이후에 역사적으로 너무나 중요해졌기에 좌파는 반유대주의의 일부나 흔적이라도 절대로 받아들이거나 허용해서는 안 된다. 

좌파의 화살은 언제나 특정한 인종이나 민족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정확한 과녁을 겨누어야 한다.  


#CeasefireNOW #GazaGenocide! #PalestineWillBeFree #BDSNow

* 지금 이스라엘의 학살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유대인들(아래 사진)


https://www.facebook.com/100001746737727/posts/pfbid0MQKoKcu16yJNnUMNs45wcofgk6qTLKZKsGJizHpGU5nHZH4ACQWwUsVxYgpJdvxLl/?mibextid=cr9u03





박노자



정재원 국민대 유라시아학과 교수

참 답답하다...그리고 놀랍고 충격적이다. 만약 다른 상황에서였다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학살과 억압에 대해 항의하고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을 지지해야 하는 것에 그 어떤 이의를 달아서도 안 된다. 게다가 지금 복수라며 벌이는 무차별 학살 국면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이러한 항의는 더욱 강력하게 전개해야 한다. 


그런데...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이번에 하마스는 무방비 상태의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고 여성과 어린이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납치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정도는 이스라엘이 그 동안 저질러온 폭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폭력이라는 말은 좌파라면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참수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생명을 경시하는 이들이 민주주의를 외치고 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 아동의 권리 운운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착잡하다. 


분명 하마스를 비롯한 이슬람권에서의 조직들은 진정한 좌파적 대안이 없고 종교적 영향력이 강한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저항 조직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극우적이고 보수적인 조직의 성격도 갖고 있다. IS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똑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모두 민중의 좌파적 대안이 아님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팔레스타인 민중을 지지하는 것과 동시에 하마스의 민간인 살해 납치 행위는 그 자체로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팔레스탄인 지지 시위를 해서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이스라엘의 민간인 폭격 살해에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마스의 테러를 지지하는 듯한 일체의 발언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억압 지배 구조 속에서 이에 저항하는 행위자들의 저항 과정의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는 마치 서구의 세계 지배, 미국 일극 패권 구조에 근본 원인 있다고 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및 영토 강탈을 옹호하는 논리의 놀라운 재현일 뿐이다. 오류를 되풀이하는 한국 좌파 일각의 스탈린주의적 작태들에 놀라움을 금지 못 하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100003338474605/posts/pfbid025hBd7YF8HTC8hV65yjbZp4KCsdGRS7uA8YCBAUmEHusdANohAoF9eQ9vTwZXRgaxl/?mibextid=cr9u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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