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서로에게 미안해 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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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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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거그려서20년살아남았습니다


<여기 서로에게 미안해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서로에게 미안해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

언젠가부터 제가 나이를 조금 먹은 후로

그분은 제가 하는 일을 모두 믿어주었습니다.

무얼 해도,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선택을 해도

전부 다 지지해주고 모두 맞다 해주셨습니다.

제가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도,

미술을 한다고 했을 때도,

학원에 나가고,

학교를 휴학한다 해도,

입시를 다시 한다 해도,

머리를 기르고,

염색하고,

음악을 하고,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든.

물론 얘기를 안 하신 것은 아닙니다.

걱정스러운 조언과 가끔은 반대의 의견도 주실 때가 있었지만

결론은 언제나 저에 대한 지지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주는 말이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것을 저는 그 분에게 배웠습니다.

——

제가 초등학생 때 그분은 돌아가실 뻔했습니다.

맹장이었는데 그걸 참으셨어요.

왜냐하면 공장에 나가서 돈을 버셔야 했거든요.

아직도 그날의 일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저는 그 분이 아프다 누워있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거든요.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 저희 먹을 것을 챙겨놓고 공장에 가셔서 밤 8시나 되어야 돌아오시는 그 일상에 아프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저는 그분은 아프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날은 아프시다고 누워계셨습니다.

그렇게 이틀을 넘게 참으시고 일하시다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으로 긴급수술을 받으셨습니다. 너무 응급상황이어서 당장 수술할 병원을 찾아야 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습니다. 마침 그때 우리 집 뒤에 종합병원인 아산병원이 생긴 직후였어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응급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지금은 모두 재개발되어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예전 살던 시영아파트에서 아산병원으로 빨리 가기 위해

아파트 뒤 뚝방길을 넘어가곤 했습니다.

뚝방위로만 다닐 수 있고 넘어가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초등학생이었지만 편한 길을 걸어 그 분에게 가면 안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일부러 비탈진 나무 숲길을,

가시 꽃들을 제치고 갈대숲을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건너가는 걸음 하나하나에

‘살려주세요’라고 끝없이 되뇌었습니다.

그런 소망을 말할 때는 최소한 이런 길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냥 편한 길로 가면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거 같았습니다.

그분의 배에는 커다란 수술 자국이 남았지만 살아나셨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그 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확하게 몰랐지만 그게 ‘미안함’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난 다음 알게 되었죠.


나는 종종 그분을 마중 나갔습니다.

지금은 잠실새내역이라 불리는 2호선의 성내역으로,

어떤 날은 그분이 일하는 공장이 있는 성수역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습니다.

——

그분은 지금도 저랑 통화할 때 제가 밖에 있다고 하면,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고 하면 좋아하십니다.

그게 좋아할 일인가? 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 마음을 알아요.

그분의 소원은 그냥 제가 ‘밖에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일하고 성공하고 돈을 벌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두 발로 밖을 돌아다니는 거요.

사람들을 만나고 일상을 사는 거요.

저는 그 전폭적인 지지 뒤에 있는 깊은 슬픔을 알고 있습니다.

그 뒤에 깔린 미안함을 알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그분은 겪은 위기의 순간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분은 제가 잘 참아냈다고 얘기했지만

제가 참아낸 것은 그분이 참아온 것에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늘 제게 미안해하고

저는 늘 그분에 대해 미안해 합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엄마 그 수많은 일들을 어떻게 참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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