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멋진 차 발견..그리고 집회 현장의 이상한 사진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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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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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신지 모르지만 차주 분이 멋지십니다 ????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투기 중단 2차 범국민대회] 집회 현장에서 이상한 사진 전시가 있었습니다.


사진의 글: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북한 공산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최후의 저지선인 '낙동강전선 방어선'에서 유엔군 지상군 사령관인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의 지휘 아래 방어하던 당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월튼 워커 중장과 작전회의를 마치고, 일본 도쿄의 유엔군 사령부로 돌아가기에 앞서, 대구 미 5공군 기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일자: 1950년 7월 26일 자료: 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


사진의 글:

“서울수복 - 한반도를 북한 공산군에 완전히 빼앗길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강철같은 의지로 대한민국을 이끈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


서울 환도식 행사 당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승만 대통령 옆은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일자: 1950년 9월 29일 자료: 월드피스 프리덤 유나이티드,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항해」“


⬆️ 이 사진들을 깃발들과 함께 여러 곳에 배치했더군요.. ⬇️





이승만의 행적과 역사적으로 물어야 할 책임..


https://jeju43peace.or.kr/kor/sub01_01_01.do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4·3 대학살의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대학살이 미군정 하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https://www.headlinejeju.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5045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자주와 통일을 바라며 나선 제주도민을 참혹하게 학살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한 죄, 한반도의 분단을 반대한 죄로 빨갱이로 내몰려 학살당했다. 1954년까지 6년 동안이나 제주 인구 10분의 1이 넘는 사람들이 잇따라 비참하게 숨져갔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2597




“이승만 아니면 김일성 논리’는 남과 북 모두 독재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으로 식민사관이 배어있다. 


정전 70년을 맞아 쓴 소설 「원시별」에 그렸듯이, 친일세력 청산을 요구한 민중을 ‘빨갱이’로 몰아 골골샅샅에서 학살한 이승만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총선에서 민심을 잃어 참패했다. 조병옥 낙선이 상징적이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Amp.html?idxno=311559




“반일 제스추어는 이승만의 정치적 자산이었다.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이승만의 인기는 올라갔다. 이런 인물이 일제 36년간 같은 민족을 핍박했던 친일파를 자기 슬하로 불러 중용한 것은 정말 역사적 수수께끼이다.“

https://www.nocutnews.co.kr/news/4441277




여수·순천 10·19 사건(이하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제주 4·3 사건 진압 출동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0월21일 여수, 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토벌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는 초기 진압작전에서 봉기군에게 밀리자 여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군대는 물론 박격포·장갑차·경비정 등 모든 수단까지 동원해 해당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후 14연대는 광양의 백운산과 지리산, 산청 웅석봉 등으로 숨어들어 본격적인 유격 투쟁을 전개했으나 순천은 10월23일에, 여수는 10월27일 군경에 의해 완전 진압되었다.


진압군의 무차별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1949년 1월10일까지 인명 피해는 총 5530명(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2명)이고 가옥 피해는 8554호(전소 5242호, 반소 1118호, 소개 2184호)였다<(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여순 사건 희생자에 대한 ‘즉결처분’, 재판절차 거치지 않은 ‘학살’

군경당국은 법적 통제를 받지 않고 작전의 편의성이나 효율성만을 고려하여 ‘즉결처분’을 남용하였다. 이에 많은 민간인들이 반군에 협조한 혐의만으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됐으며, 이는 ‘즉결처분’이 사실상 학살이었다(https://www.jinsil.go.kr/fnt/nac/selectNoticeDetail.do?bbsId=BBSMSTR_000000000717#).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을 계기로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한 모든 반(反) 이승만 성향의 군인들에 대한 대대적 숙군 작업에 착수하였고, 이에 전군의 5%에 달하는 4,750명이 축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460432&cid=43667&categoryId=43667).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지만 숙군 작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살아남는다.



국군 제14연대, 제주 4·3사건 진압명령 거부하고 봉기

여수순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이라고도 부르는 여순사건은 제주 4·3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다. 1948년 10월19일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을 점령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 시작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 반대 무장봉기가 진정되지 않자, 국군과 경찰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 일부 병력을 제주도로 파견하기로 했다. 이에 1948년 10월19일, 지창수(池昌洙)를 비롯한 제14연대 병사들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하러 갈 수 없다며,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승만, ‘아동’ 포함 철저 진압 강조, 수많은 양민 학살 계기 돼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처음에는 이 사건이 극우세력과 극좌세력이 합심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10월21일,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한 ‘반국가적 반란’이라는 이른바 ‘혁명의용군사건’을 발표했다. 그러나 혁명의용군은 조직적 실체도 없는 허상의 군대였고, 이후 재판에서 무력공산혁명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사태의 원인이 공산주의, 좌익세력에 있다며 ‘아동’까지 포함한 철저한 진압을 강조하면서 진압군이 잔혹하게 민간인을 학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의 무차별적인 동족학살 지시는 6·25 전쟁을 전후해 미군의 직간접적 개입 속에 발생한 보도연맹 학살사건, 거창학살 사건 등 수많은 양민학살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Amp.html?idxno=309749



[독립자금 횡령]

사지도 않은 땅 샀다 하고 학교 건축기금 모아

독립자금을 자기 돈이라 주장하며 동포와 싸워

무일푼 1년 만에 4000달러 주고 땅 3500평 매입

https://m.khan.co.kr/article/201408120600055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492022.html








#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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