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포스트] 한국의 독립운동가였던 나의 증조 할아버지. 그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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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코샤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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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 워싱턴포스트의 도쿄 지국장 미셀 예희 리(Michelle Ye Hee LEE)기자의 증조할아버지인 애국지사 이종욱 및 지사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이장이 이루어진 2023년 4월 한국방문기의 기사를 17일 부산발로 워싱턴포스트가 타전하고 있습니다. 미셀 리 지국장은 워싱턴포스트에 팩트 체크 심층 취재 기자로 2014년 입사했으며 이전에는 애리조나 리퍼블릭 지의 시니어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이 지국장은 워싱턴포스트 도쿄 지국장 부임 이후 한국의 이태원 참사의 심층 보도에 기여했으며 일본,한국 및 동아시아 국제관계,정치,외교분야 취재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20:46 KST - Washington Post / 부산 - 보통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을 대면하는 걸 기대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유골을 직접 눈으로 보는 건 더욱더 아니다. 


하지만 난 보았다. 내 증조할아버지는 생전에는 키가 크셨다. 나는 올해 초 증조할아버지의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그의 유골을 보았으며 그 사실을 깨달았다.


57년간, 이종욱은 한국의 남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 부산에 있는 작은 가족묘지에 계셨다. 그의 인생에서 그는 한국을 강제점령한 일본 제국에게는 위험한 인물로, 무장봉기를 주도하고 투옥된 독립운동가였다. 그리고 올해 그는 한국에 대한 애국심을 인정받고 그의 유해는 애국지사로서의 예우를 받으며 가족 묘지에서 국립 묘지로 이장되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가 국립 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나는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인생과 나의 인생이 어떻게 한 세기 동안 한국인이라는 독특한 존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는지 발견했다. 


한반도에는 1945년에 끝난 일본 식민지 지배로부터 분단에 이르기까지, 극적인 한국 현대사를 아우르는 사연들을 집집마다 찾아볼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 불리우는 북한은 공산주의와 빈곤으로, 그리고 대한민국이라 불리우는 남한은 민주주의와 상대적 풍요로움으로 그 사연은 이어 내려온다.


그리고 그건 나의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사진설명 : 독립운동가 이종욱의 가족들이 부산에 있는 이종욱의 묘소에 모인 가운데 스님들이 이종욱을 기리는 축원 기도를 하고 있다. 사진촬영 : 티나 슈 / 사진제공 : 워싱턴포스트)


나의 증고모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일본 제국 육군의 위안부 성노예 강제 동원을 피해 일찍 결혼한 수많은 10대 조선 소녀들 중 한 명이었다. 외할머니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을 탈출한 수많은 이주민들 중 한 분이었고, 많은 가족들이 혼란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전쟁은 1953년 휴전으로 끝났고 남한과 북한에는 수많은 이산가족이 남겨졌다. 할아버지는 그의 형과 헤어진 후 다시는 형을 보지 못했다.


나의 부모님은 한국 민주화의 역사적인 날에 결혼을 하셨다. 1987년 6월 10일, 군사 정권의 종식을 촉구하는 수십만 명의 한국인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결국 군사 정권은 시민의 손에 의해 무너졌다.


나는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적 변화를 상징하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그해 여름 서울에서 태어났다.


(사진설명 : 워싱턴포스트 도쿄 지국장 미셀 예희 리(Michelle Ye Hee LEE)가 서울에서 촬영한 오래된 가족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 사진촬영 : 티나 슈 / 사진제공 : 워싱턴포스트)


내 나이 7살 때 가족이 괌으로 이민을 온 이후,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나는 나 자신을 완전한 한국인이라고 느껴본 적도, 그러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디아스포라 코리안 - "이주민으로서의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여러 문화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내가 있는 그곳이 바로 내가 조국이라고 느끼는 곳이다. 한국 국적을 포기한 미국인 뉴스 기자로서 나는 현재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한때 나의 증조할아버지를 지지하거나 혹은 반대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했던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이런 나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세대의 궤적은 20세기를 관통하는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의 한 단면을 반영한다. 나는 나의 증조할아버지의 유산을 탐구하고 싶었다.


나의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의 이름을 묻고 이종욱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한국정부의 기록보관소를 찾아 당시 일본 제국 점령부서(총독부)의 조사서류,재판기록,진술서 그리고 판결문을 찾았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한국의 독립기념관이 위치한 천안으로 가서 100여년 전의 기록들과 서신들을 확인했다. 그곳에서 나는 증조할아버지 이종욱이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게 되었다.


일본 제국은 1910년, 한국을 공식 강제 병합했지만 증조할아버지가 어린 아이였을 시절인 그 전부터 꾸준히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넓히고 있었다. 학교에서 한국어를 금지하는 것부터,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로 일하도록 징용하는 것까지, 잔악한 식민 통치는 한국민들에게 끓어오르는 분노와 비밀 저항 네트워크를 조직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한국민들의 분노는 1919년 3월 1일 일련의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항의시위로 분출되었다. 이날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에 의해 소멸되었던 그들의 국기를 기억을 되살려 그려 손에 들고 흔들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를 조직한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그 후로도 일본 제국의 한국 점령은 26년이나 계속되었지만 이날의 시위는 이후 전국적인 시위로 퍼져나갔으며 한국민들의 저항정신 고취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은 3월 1일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하고 기념행사와 시위재연행사를 열고 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 이종욱은 당시 일본에서 150일 마일 떨어진 조선 남동부의 소도시 울산에 살고 있는 22살 청년이었다. 그와 그가 속해있던 비밀 청년 운동가 조직 소속 동지들은 전국적인 시위소식을 듣고 자신들도 울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4월의 어느 날 저녁, 20여명의 청년들이 흰색 비단을 펼치고 혈서를 작성했다. 그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축구공을 공중으로 차는 것을 신호로 그들은 울산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그들이 직접 만든 태극기를 들고 해방을 외치자 100여명이 넘는 다른 한국인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Long live the independence of Korea)!" 


(사진설명 : 굴삭기가 독립운동가 이원욱이 묻힌 부산의 가족묘지에서 국립현충원 이장을 위해 묘지를 파고 있다. / 사진촬영 : 티나 슈 / 사진제공 : 워싱턴포스트)


전국의 수많은 시위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시위도 폭력적인 진압을 불러왔다. 기록에 따르면 시위에 놀란 울산 주둔 일본 경찰이 급히 지원병력을 요청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은 시위대와 몸싸움을 벌였고 총검을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기록에는 이날 진압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한 5명이 사망했다. 증조부와 다른 시위주동자 13명이 체포된 후, 남은 사람들은 다음 날에도 시위를 계속했다.


1919년 7월 12일 일본 제국 지배하 울산고등법원은 증조부에게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하고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는 수차례 일본 제국측의 반성문 작성 요구에도 전향하지 않았다. 출소 후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그리고 나의 증조할아버지 이종욱은 1945년 그의 조국의 해방을 맞았다.


1966년 그의 죽음은 그의 삶만큼이나 격렬했다. 불치병 말기 진단을 받은 그는 남은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자 스스로 곡기를 끊어 삶을 마감했다. 그는 부산 인근의 가족 묘지에 묻혔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동안 독립운동가들도 조명받게 되었다. 증조할아버지 이종욱은 1980년 사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으셨다. 그가 받은 마지막이자 최고의 영예는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의 알링턴인 대한민국 국립 대전현충원의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된다고 결정할 때 찾아왔다. 증조할아버지는 2023년 4월 11일 안장될 예정이었다. 나는 그곳에 가고 싶었다.


증조할아버지의 유골을 화장하던 그날의 아침은 재킷을 입기에는 너무 춥고 코트를 입기에는 너무 따뜻했다.(재킷을 입었지만 나중 한참을 후회했다.) 88세의 유일한 직계 가족들인 증조부 가족이 그날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고, 나는 기사를 작성할 요량으로 제사 의식에 참여하겠다고 부탁했다. 동틀 무렵, 우리는 증조할아버지의 묘지가 위치한 곳으로 차를 타고 출발했다.


회색 승복 차람의 스님 두 분을 만나 우뚝 솟은 가느다란 나무들로 둘러싸인 가파른 길을 따라 등산을 시작했다. 우리는 불교 전통에 따라 배, 사과, 생선, 밤, 쌀, 야채, 전(튀김) 등 죽은 자에게 바치는 제사 음식을 한상자 준비했다. 두 시간 동안 스님들은 나무 목탁으로 박자를 맞추며 리드미컬한 축복과 기도를 낭송하며 향을 피우고 땅을 어지럽히기 전에 산의 정령에게 허락을 구했다. 증조할아버지의 가족들은나에게 이러한 의식이 이장을 앞두고 증조할아버지의 영혼을 축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가족이 괌으로 이민을 간 후 더 이상 한국에서 조상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 의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생전 처음으로나는 제사라는 것을 경험한 셈이다. 절을 하고 기도문을 들었으며 종이컵에 담긴 소주(한국의 알콜음료)를 양손으로 잡고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서 향기를 맡았고, 존경과 축복의 의미로 무덤에 부었다.


한국에서 유족들이 개장이나 이장을 위해 조상의 묘지를 파묘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불교 관습상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가족들은 묘지를 떠나 하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기사 작성을 위해 더 머물고 싶었다. 주지 스님에게 이러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허락해주셨다. 옆에서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세 명의 무덤 파는 인부들이 담배를 피우며 흙의 질에 대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이 삽질을 하며 유골을 수습하려고 파내려가는 동안 나는 그날 아침 증조할아버지의 성격에 대해 들은 것을 떠올렸다. 증조할아버지는 불의를 볼 때마다 들불처럼 분노를 표현하셨다고 큰삼촌이 말하셨다. 그 이야기를 생각하며 문득 내가 7살 때 놀이터에서 나를 괴롭히던 친구에게 욕설을 퍼부었던 나의 분노도 정당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그분의 분노의 불씨를 물려받았는지도 몰랐었을 일이다.


(사진설명 : 독립운동가 이종욱의 국립현충원 이장을 위해 인부들이 유골을 수습하고 있다.(좌) /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비석이 쓰러져 있다.(우) / 사진촬영 : 티나 슈 / 사진제공 : 워싱턴포스트)


바로 그때 인부들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낡은 나무 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대퇴골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의 증조할아버지의 시신은 흙 속에서 부패되어 가고 있었다. 인부들은 고고학 유적지에 온 것처럼 나의 눈앞에서 손으로 할아버지의 유골을 캐내고 수습했다.


나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유골로 그를 대면하게 되었다. 증조할아버지의 치아는 여전히 턱에 박혀 있었다. 갈비뼈의 대부분도 남아있었다. 그의 발가락뼈는 부패된 갈색 양말 속에서 달그락거렸다. 나는 그가 육신으로 저기 누워있는 것을 겨우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증조할아버지가 강제로 배워야 했던 일본어를 나는 직업적 필요에 의해 스스로의 의지로 공부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과거 식민지 시대의 역사적 울타리를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있고, 나는 미국인으로서 이를 목격하며 그들의 노력을 취재하고 있다. 그가 이 모든 사실을 안다면 다시 한 번 들불같은 분노를 나에게 할 것인가? 아니면 이해해주실까?


(사진설명 : 독립운동가 이종욱의 아들인 이시우 씨가 유골을 들고 부산의 한 화장장에서 나오고 있다. / 사진촬영 : 티나 슈 / 사진제공 : 워싱턴포스트)


인부들은 그의 유골을 흰 천으로 수습하고 그 위에 태극기를 덮었다.


나는 유족들과 함께 화장터로 향했다. 증조부 옆에 서서 증조할아버지의 유골이 소각로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문이 닫힐 때까지 절을 한 다음 뼈가 고운 재로 변하는 것을 기다렸다. 주변에서 나는 증조부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보았다.

"기분이 어떠세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느낄 게 없구나." 그가 말했다. "인생은 너무 허무해. 너무 허무해서 울고 싶단다."

우리는 유골함을 절에 하루밤 안치했다. 다음날 우리는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안식처인 대전현충원으로 출발했다.


(사진설명 : 워싱턴포스트 도쿄 지국장 미셀 예희 리(Michelle Ye Hee LEE)와 그녀의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이종욱의 유해를 든 의장대가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 사진촬영 : 티나 슈 / 사진제공 : 워싱턴포스트)


(사진설명 : 워싱턴포스트 도쿄 지국장 미셀 예희 리(Michelle Ye Hee LEE)와 그녀의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이종욱의 위령식이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불교식으로 치러지고 있다. / 사진촬영 : 티나 슈 / 사진제공 : 워싱턴포스트)


(사진설명 :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애국지사 이종욱의 묘소에 유족 및 후손들이 모여 있다. / 사진촬영 : 티나 슈 / 사진제공 : 워싱턴포스트)


유산은 이어진다

올해 4월은 음력으로 윤달, 한국에서는 이사,개보수,이장 등 생활에 큰 변화에 상서로운 때로 여겨진다. 

서울의 남쪽,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의장대가 사열식과 행진으로 우리를 맞았다.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묵념과 기도, 그리고 흰 국화를 들고 사랑하는 이들을 배웅했다. 그날 증조할아버지를 포함해 7명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들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 이름뿐이다. 나는 나머지 6명 중 증조할아버지와 같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한국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라는 말이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들의 조국 독립을 위해 투옥되었고, 투옥시간중 고문을 당해 일자리조차 구하기 못해 어려움을 겪었으며 심지어 자녀들을 양육,교육시킬 여력조차 없었다.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독립 운동으로 인해 저축한 돈과 재산을 모두 탕진하거나 감옥에서 사망했다.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의 가족,자손들은 여전히 정부 보조금에 의존한 채 살아가고 있다. 


전날의 유골 수습과는 달리 이날 이장날에는 가족들이 모두 참석했다. 나의 부모님들은 괌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 참석했다. 애국지사 이종욱의 후손들 그리고 2, 3, 4세대까지 20여명이 모두 모였다.우리들은 각자 증조할아버지의 새 무덤에 흙을 뿌리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나의 아버지는 전날 내가 했던 의식 - 소주 한잔을 들고 시계 방향으로 돌린 후 새 무덤에 뿌리셨다 - 을 이날 똑같이 하셨다.


유산이란 기억이다. 이 기억은 우리 시대를 초월해, 그리고 우리가 운이 좋다면 우리 후손 그리고 그 이후 먼 미래의 몇 세대까지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기억이기도 하다.


(사진설명 : 대한민국 대전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사진촬영 : 티나 슈 / 사진제공 : 워싱턴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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