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언급될때마다.. 인류역사에서 계속 회자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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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주감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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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볼커 연준 의장 (재임기간 1979~1987년)   2019년 향년 92세 돌아가심


카터도 처음에는 인플레이션 억제 캠페인을 벌였으나 

시중 금리가 20%까지 올라가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고금리가 경기를 악화시켜 유권자 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카터는 연준의 독립성을 지켜주기 위해 볼커의 정책에 개입하지 않았다. 

1980년 가을 대선에서 카터는 ‘신자유주의와 감세 정책’을 들고나온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결정적 패인 중 하나가 볼커의 고금리 정책이었다.



이후 볼커는 더욱 독하게 긴축 정책을 밀어붙였다. 

1981년 6월 인플레이션이 14.8%까지 치솟자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렸다. 

무서운 결단이었다. 레이건 대통령도 고금리 정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미국 경제가 장기 불황에서 빠져나오려면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막료들이 볼커 연준 의장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카터처럼 연임에 실패한다는 경고를 쏟아냈지만, 

레이건은 우리가 연준을 두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며 개입하지 않았다.



볼커에 대한 국민의 원성은 커갔다. 

은행 금리가 21.5%까지 치솟는 과정에서 경기 침체로 많은 회사가 파산하며 

실업률이 10%로 치솟아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을 잡지 않고서는 미국 경제는 장래가 없다는 것이 볼커의 생각이었다. 

빚더미에 앉게 된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워싱턴으로 상경했다. 

이들은 도시 한복판을 행진하고 연준 건물을 봉쇄하며 볼커의 퇴진을 요구했다. 

키가 2m가 넘는 볼커는 권총을 차고 다녀야 할 정도로 온갖 시위와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고금리로 인한 고통은 1981년까지 3년이나 지속되었다.



1981년 중반 들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금 이자가 높으니 돈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은행 우대 금리 21.5%와 그 무렵 인플레이션 14.5% 차이만 해도 컸다. 

시중 유동성이 줄어드니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했다. 

1980년 6월 14.8%까지 올라갔던 인플레이션율이 1981년 9%로 꺾였다. 

1982년에는 목표치 4%에 도달하여, 볼커가 긴축을 풀자 경제는 힘차게 살아났다. 



이듬해에는 경제가 살아나면서도 인플레이션은 2.4%까지 떨어졌다. 

이로써 볼커는 밀턴 프리드먼이 주장한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라는 명제를 대중 뇌리에 심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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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에


오라메디 처방과

알보칠 처방이 있는데




볼커식 알보칠 처방이 낫지 않나 생각중입니다.

짧은 기간 죽도록 힘들고 나서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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