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극비문서 입수 “일제는 한반도를 총알받이로 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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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름다운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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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서 1945년 당시 일본군의 극비문서가 발견됨.

- 동북아역사재단 조건 연구위원이 내용을 처음 확인함.


2. 문서명 ''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시의 상황보고, 육군조병창''

- 총 120쪽 분량이며 모두 극비로 분류

- 전쟁 막바지의 일제의 한반도 활용 계획과 침탈 상황이 담겨있음.

참고 : 

- 일본의 본격적인 카미카제식 자살공격은 1944년부터였다.

- 일본의 히로시마 핵폭탄 폭격은 1945년 8월이었다.


3. 문서의 주요 내용은 크게 2가지로 나뉘어진다.

1)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조병창을 지하화한다.

2) 일본 도쿄 제 1조병창을 부평으로 옮긴다.


4. 문서가 나오기전까지는 부평에 있는 많은 일제 유적들이 왜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이 몰려있는지 몰랐으나

알 수 있게됨.


5. 내용

- 몇명을 강제동원했는지 여부

(몇명인지도 세세하게 표시되어있으며 강제동원으로 충원한다고 나와있다.)

- 중등부터 시작한 학도병 강제동원 계획 여부

- 당시 패전 중이던 일본이 미국 공습으로부터 본토(일본)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한반도쪽으로 돌리기 위한 계획

(지도를 보면 최후 ''결7호작전''이 한반도로 표시되어있음.)

더욱 어이없는건 부평 조병창을 지하화 하면서 방공부대, 방공망, 방공시설등을 사실상 아무것도 배치하지 않음.


6. 무기 생산시설을 한반도로 옮겨 전투를 이어나간다면

1) 미군의 공격을 해야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2) 일본 본토에 집중되는 공격을 분산시켜 피해를 줄이는 효과를 볼 수 있다.

3) 일제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연합국에 영토를 분할 점령되는 최악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방법으로

희생양으로 제공할 땅이 필요했는데 그게 한반도 였다.

- 조건 연구위원 

''그리고 이건 실패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 결과적으로 일본은 분할되지 않았지만 한반도는 영토가 분할 되었다.''

'' 부평에 있는 일제 유적들을 보존하여 실효 자료로 남겨야 한다.''


7. 3월 문서인데 4월, 5월 식에 문서도 있을것으로 예상되며 일본군은 전후 만행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주요문서를 대부분 소각했으나 이번 건 처럼 일반 문서속에 끼워져 있다가 발견될 수 있다고 예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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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일본 본토에 있는 무기, 보급물자 생산시설을 한반도로 옮겨 전쟁을 계속 수행한다.

- 전쟁에서 승리하면 좋고

- 아니더라도 한반도가 폭격을 대신맞아 총알받이를 해주니 본토는 폭격을 피할 수 있어서 좋고

- 협상의 우위에 설 수 있다라고 판단했다는 문서


2. 현재 부평에 있는 일제 유적들을 남겨서 실효 자료로 남겨야 한다.


내용이 너무 많아서 다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 링크를 타고가시면 더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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