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진주성 전투 못지않게 처절했던 남원성 전투(11000명 vs 56000명)

페이지 정보

작성자 코코샤샤
작성일

본문


 1597년 음력8월12일


남원성 전투

 

음력7월16일 칠천량 해상에서 조선수군을 완전히 박살낸 왜군은

자신감을 얻어 재차 조선에 대한 침공을 감행합니다.

이것이 정유재란의 발발입니다.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는 3년간의 임진왜란이 왜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간 이유가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고,

이에 일본군의 최우선 목표를 전라도 점령으로 선정합니다.

 

따라서 왜군은 총병력 14만을 반으로 나눠

좌군과 우군으로 편성합니다.

이중 전라도의 공략을 맡은 좌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등과

이를 지원하는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왜 수군과 합세하여

총 병력 5만 6천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남원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남원성 공성 작전도


일본군 좌군은 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진격하기로 계획을 세웁니다.

남원성은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관문도시였으며

일본군으로서는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남원성은 국내에 흔한 산성의 형태가 아닌

전형적인 중국식 읍성이었으며,

장방형 평지의 성에다가 해자를 두르고 성문 앞에는 돌다리를 건축한 성이었습니다.

 

음력 8월 7일

구례현감 이원춘이 이끄는 구례 수비군은 순식간에 궤멸되었습니다.

이원춘은 겨우 몸을 빼내는데 성공하여 남원성으로 향해

일본군 좌군의 접근을 경고를 알렸습니다.

당시 남원성에는 명나라군 부총병 양원이 이끄는 명군 3000명과

남원부사 임현이 이끄는 남원군민 7000명,

예조참판 정기원이 이끄는 파진군(화약 전문 특수부대) 12명이 주둔 중이었습니다

 

음력 8월10일

명군 부총병 양원은 급히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이복남은 휘하 병력 3천을 이끌고 남원성의 구원에 나섰으나,

조선군 병력 가운데 집단 탈영이 속출하여 도중에 군관 50명만 남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이복남은 별수 없이 이 군관 50명을 데리고

왜군에게 식량이 넘어가지 않도록 곡성군에서 조창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조방장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 신호, 광양현감 이춘원, 방어사 오응정이 이끄는

 병력 1천과 합류하여 남원성으로 향해 들어갑니다.


남원성 구조


음력 8월12일

전라병사 이복남은 무사히 병력 1천을 이끌고 남원성 외곽에 도달했지만,

이미 남원성은 일본군에게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이에 전라병사 이복남은 나팔과 태평소를 불고 북을 치며

만복사 앞 대로를 따라

'왜군 진영 사이를 그대로' 유유히 통과했습니다.

일본군은 너무 놀라 공격도 하지 못했는데, 일본군은 사로잡고 있던 조선군 포로들에게

"저 자는 누구기에 이리 당돌한가?" 라고 물었고

조선군 포로들은 "전라병사 이 아무개 이다" 라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으로 입성한 이복남의 부대는 북쪽 성벽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동, 남, 서쪽은 명군이 배치되었습니다.

 

음력 8월13일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시를 받아 3갈래로 진격한 일본군은 

북문은 시마즈 요시히로가, 동문은 하치스카 이에마사, 남문은 우키다 히데이에, 서문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각각 공격을 개시합니다.

 

오후 12시경 왜병 5명이 조선군을 도발하자

명군 부총병 양원은 이복남에게 이를 처리할 것을 지시합니다.

전라병사 이복남은 왜놈은 총으로 잡는것이 제맛이라며 

휘하의 조총병을 선발해 왜병을 저격하였습니다.

왜병 3명이 죽었습니다

 

오후2시경 왜군 일부가 몰려와 성에 사격을 가하자 조선군은 대완구로 비격진천뢰로 포격하여 반격합니다.

왜군이 물러나자 양원은 밤사이에 성 주위에 마름쇠를 뿌려 수성에 대비했습니다.

 

음력 8월14일

왜군은 본격적인 공성준비에 나섰습니다

주변 민가를 허물어 진흙으로는 방벽을 쌓고 짚단으로는 해자를 메웁니다

왜군의 집요한 공격에 명군 부총병 양원이 기병 1천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나

오히려 피해만 입고 성 안으로 들어옵니다.

 

 

음력 8월15일

왜군은 짚단을 무수히 많이 만들어 자신들의 진영에 쌓아놓았는데, 성안의 연합군은 어디에 쓰는 용도인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큰 비가 내리는 가운데 조명연합군은 명군 유격장 진우충의 원군을 기다렸으나

 진우충은 적이 너무 많다며 구원요청을 거부합니다.

일부 조선군 부대가 급히 남원성을 구원하려 접근하다가 각개격파 당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명군 부총병 양원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동문에 올라 고함을 지르는 등 아군의 사기를 높이려 하였습니다.

이를 본 왜군이 전령 5명을 보내 양원과의 대화를 청하자

 양원은 통역관을 통해 짧게 그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후 양원은 전령 2명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냈고, 고니시는 이 명군들을 극진히 대접한 후 돌려보냅니다.


저녁에 고니시가 보낸 전령 5명이 양원을 찾아왔습니다.

이 전령들은 양원에게 성을 비우고 철수할것을 요구했으나

양원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거부하였습니다.


협상이 결렬되자 왜군은 예의 그 짚단을 성벽에 기대어 쌓아

그것들을 타고 올라와 성벽을 넘어 성안으로 난입합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벌어졌습니다




 


음력 8월16일

왜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자 새벽 2시경에는 남문과 서문이 왜군의 손에 넘어갑니다

조명연합군은 혼란에 빠져 북문으로 몰려들었고

명군 부총병 양원은 기병 30을 대동하고 성을 빠져나갑니다

 

성안에 남은 조명연합군은 전라병사 이복남의 지휘 아래 저항하였으나,

패색이 짙어지자

전라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남원부사 임현,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춘 등은

화약창고를 불태워 폭사하여 자결하였습니다.

 

남은 조명연합군은 모두 전사하였고,

왜군은 남원 백성들까지 모조리 닥치는대로 도륙,학살을 벌였습니다.

 

남원성 전투에 종군하였던 승려 쿄넨(경념)은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어서 생포한 자는 없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라고 기록하며 당시의 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남원성이 함락되자 전주성의 진우충은 병력을 이끌고

바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왜군은 별 저항도 받지 않고 전주성까지 점령합니다.

왜 좌군이 남원성을 함락시키던 날

왜 우군 역시 황석산성을 점령하며

임진왜란 동안 유일하게 점령을 면했던 전라도는 결국 왜군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명군 부총병 양원은

적전 도주에다가, 왜군과 내통하여 자신만 몸을 뺄 수 있게 하였다는 의심을 받았고,

결국 훗날 양원은 진우충과 함께 명나라 본국에서 사형되어

그 목이 조선에 조리돌림 당하였다고 합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 못지않게 처절하고 참혹한 전투였으나, 오늘날 남원성 전투에대해 아는 사람들 얼마 없죠...

관련자료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