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제주항 부두, 포승줄에 묶인 '알몸 남녀 5백명'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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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망원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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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대해 몰랐던 사실이군요"


어제 제주도에서 벌어진 추가학살 글이 올라왔는데요.


1947년 4.3 봉기사건 때 이승만 정권의 혹독한 진압을 겪은 제주도민들은

6.25 직후에 더 기막힌 일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죠.


보충 차원에서 당시 목격자의 증언을 발췌 했습니다.



1. 제주항과 일제가 운영했던 주정공장


"바다길의 관문인 제주항도 수장이라는 4·3의 비극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제주항은 국군, 경찰, 서청(서북청년단) 등 각 부류 응원대, 각종 무기 등이 
 들고 나던 4·3의 시종(始終)을 상징하는 현장이기도 했다.
 
 게다가 제주항 정면 육상에는 4·3 당시 주민들을 수용하던 최대의 수용소이자 
 감옥이었던 주정공장 창고가 위치해 있었다."


(주: 일제의 국책기업이던 동양 척식회사가 제주도에서 운영했던 주정공장은 

      수탈한 고구마와 강냉이를 모아 군용 알콜로 가공 생산하던 공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창고가 있었죠.)



2. 6.25 발발 이후 한 달여... 1950년 8월 4일 밤 9시.


당시 제주항 부두 파견 헌병대 경계 근무자의 육성증언입니다.

야간경계를 서던 故 장시용씨는 공장에서 끌려나온 시민들의 마지막 길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합니다.


"그날 밤에 부두파견 현병대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저녁 8시경이 되니까 그곳이 한쪽은 사무실이었고 맞은 편 한쪽은 창고였습니다. 
 사무실이나 창고는 작았어요. 

 3~4평쯤된 창고 안에 들어가서 보니까 밖을 볼 수 있게 유리창이 30~40cm 정도로 
 박아진 것이 있었습니다. 시간은 아홉시 조금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3. 빽빽하게 사람들을 태웠던 트럭.

   부두에 내린 남녀 500명은 모두 "알몸"이었다.


"배는 부두에 정박에 있고 왜정 때 고기잡던 배인데 배는 1백톤이 조금 넘을 듯한 배입니다. 
 
 배가 있는 쪽으로 차가 옵디다. 
 그 때 차가 들어오는데 보니까 꼭 열 대였습니다. 
 바로 내 앞에서 하는 일이니까 숫자를 셀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연병장 부두 앞에서 벌어진 일이지요." 

"여자고 남자고 옷을 입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부 옷을 벗은 알몸이었습니다. 
 작은 줄로 사람을 뒤로 포승 채우듯 큰 줄로 사람들을 엮어서 차에 태워 배로 가는 것입니다. 
 차 한 대에 50명씩 태웠으니까 차 열대로 꼭 5백명이었습니다. 

 유리창을 통해서 바로 눈앞에서 셀 수 있는 사람이 틀림없는 5백명, 
 더도 덜도 아닙니다." 



4. 새벽 3시에 귀항한 배는 비어있었다.


 "그 사람들을 싣고 나가버리니까 나는 창고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곳에서 보니까 5백명을 태운 배가 나가는데, 멀리도 안나간 것 같습니다.   

  그 배가 들어오는 시간이 (새벽) 두시 반에서 세시쯤은 되었을 것입니다. 
  배가 들어오는데 사라봉 위로 달이 떠올라왔습니다. 
  보름이 지난 것은 확실하고. 

  그 일이 하도 어마어마한 일이어서 엊그제 본 것 같이 (기억이) 또렷합니다."
   (제주항 부두파견 헌병대 경비 근무병 장시용씨 증언)



출처: 한라일보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6)제주항과 수장(水葬)학살

(주: 증언 채록자는 오승국 前 4.3 평화재단 트라우마 부센터장입니다.)



촌평)


이런 집단수장 학살은 경남 통영 (한산도 앞바다), 거제도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4.3 봉기사건을 겪었던 제주도가 가장 규모가 컸죠.


이승만 정권은 단순 동조자나 귀순자로 분류해서 방면조치를 했지만 관리차원에서 보도연맹에

의무가입시켰던 시민들도 인민군에 협조할 것이라는 예단에 따라 남김 없이 학살했던 것이죠.


왜 알몸으로 옷을 벗겨 수장시켰을까요?

인적사항과 흔적을 말소시켜 존재 자체를 지우려고 했던 것이죠.


소련 각지의 진격지에서 유태인들을 모아 도륙했던 나치도 희생자를 매장 해주는 시늉을 해줬어요.


나치독일은 이민족이던 유태인을 '절멸대상'으로 봤다고 하지만

해방 5년차 이승만 정권은 같은 겨레인 동족을 무슨 존재로 봤던 것일까요?


'이승만의 숭고한 건국전쟁(?)'에서 정권에 고분고분 순응하지 않았던 국민들은 

그저 "예방차원의 박멸대상"이었을뿐입니다.


서울 사대문 안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주화 시위에 실탄 조준사격을 감행했던 정권도 

이승만이 유일무이 했죠. 


1960년 4월 19일 하루에만 서울의 학생들과 시민 100여명(!)이 사망했습니다.



총격 순간의 경무대 앞 현장.
총탄을 맞고 비틀거리는 학생들에게 화살표가 찍혀 있습니다.
동아일보 이명동 사진기자


도대체 어떻게 역사를 바라봐야 '이승만 칭송'이 가능해질까요?


애써 현대사에 눈 감고 독재자와 학살자를 빨아주는 세태에 구역질이 납니다.

굥의 나라는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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