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바쳐 조선인 고아들을 돌본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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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다 가이치 (曾田 嘉伊智)
1867년 10월 20일 일본국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출생.
젊은 시절 초등학교 교사와 탄광 광부, 노르웨이 상선 선원, 독일 회사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행실도 못난 불량배라서 주위에서 좋은 소리도 못 들었다. 다만 머리만큼은 똑똑해서 중국어, 영어, 독일어 3개 국어를 할 줄 알았다.
1899년 어느 날, 대만에서 일하던 소다는 술에 만취해 길거리에 쓰러졌다. 그가 다시 깨어나보니, 어떤 여관방에 눕혀져 있었다. 소다는 누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여관주인에게 물었으나, 주인은 '어떤 이름 모를 조선인이 당신을 업고와서 숙박비와 약값까지 모두 지불하고 갔다'라고만 말했다. 소다는 자신을 도와준 조선인을 수소문했지만 결국 누군지 찾지 못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소다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술도 끊고 망나니처럼 살던 행실도 고쳤다. 그리고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은인의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으로 1905년 6월 조선으로에 건너왔다. 소다는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전신)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YMCA 종교부 총무를 맡고 있던 월남 이상재를 만난 뒤 그의 인품에 감화돼 개신교에 귀의했다. 4년 뒤에는 숙명여고와 이화여고 영어 교사 우에노 다키코를 만나 결혼했다. 그때부터 소다는 경성감리교회 전도사가 됐다.
1911년 9월 일제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조선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민족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하는 이른바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윤치호·이상재 등 YMCA 인사도 끌려가 고초를 겪자 소다는 데라우치 총독을 직접 찾아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왜 벌을 주려 하느냐, 무고한 사람을 당장 석방하라"고 따졌다. 1919년 3·1운동 때도 구속자 석방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법정에서 이상재 재판을 맡은 판사를 꾸짖기도 했다.
1913년, 소다는 용산구 후암동에 설립된 가마쿠라보육원 책임자로 임명됐다. 당시 세계 대공황으로 먹고 살기 힘들었던 경성 거리에는 고아들이 넘쳐났다. 특히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간 사람들이 돌보지 못해 버려진 자식들도 많았다. 5년 뒤인 1926년 부인 우에노도 교사를 퇴직하고 함께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소다 가이치 부부는 고아들을 돌보면서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그는 매일 같이 직접 수레를 끌고 일본군 부대를 돌며 군인들이 먹고 남긴 밥을 얻어왔고 쓰레기통을 뒤져 헌 옷가지를 주워와 아이들을 먹이고 입혔다. 버려진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젖동냥을 하다가 쫒겨나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그를 ‘거지, 일본의 수치, 배신자'로 부르며 대놓고 비국민 취급 했다.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조선인들은 그를 ‘위장한 자선가’, '고아를 납치해가는 인신매매범'이라며 헐뜯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키운 고아들의 상당수는 훗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런 연유로 소다는 툭 하면 경찰서로 불려가 독립운동가들의 끄나풀이라며 심문을 당해야 했다. 아직 어린 고아원 소년들이 일본경찰에게 대들어 유치장에 갇히면 직접 찾아와 고개를 숙이며 '제 잘못입니다'라고 빌며 아이들을 꺼내왔다. 하지만 그는 그런 행동을 한 아이들을 절대 혼내지 않았다.
보육원은 순전히 기부에 의해서만 운영돼서 항상 재정난을 겪었다. 그래도 그때마다 다른 기독교계 인사들과 익명의 복지가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한번은 보육원이 폐원 위기에 몰렸을 무렵, 정문에 편지가 든 보따리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편지에는 해외로 망명하는 조선인이 고아들을 위해 써달라며 남긴 옷가지와 시계, 그리고 현금 1천 원(1939년 당시 1원의 가치는 14,000원. 당시 쌀 1가마니가 13원이었음.)이 함께 들어 있었다.
소다와 우에노 여사는 가마쿠라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1945년 해방까지 약 1천여 명의 고아들을 키워냈다. 해방 후 수많은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떠나야 했지만, 미군정은 소다 부부에게 남아있을 수 있도록 특별히 영주권을 발급해주었다.
1947년, 소다는 본토 일본의 회개를 촉구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에노 여사는 고아들을 돌보느라 조선에 남았다. 일본에서 소다는 세계 평화'라고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든 채 전국을 돌다니며 '일본은 한국에게 죄를 지었고 그것을 반성해야 하며, 일본인들이 60만에 이르는 재일교포들을 포용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다가 떠난 자리를 지키던 부인 우에노는 1950년 1월, 고아들을 돌보다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먼저 묻혔다. 당시에는 한일 간 국교가 없던 상태여서 민간인이 양국을 오갈 수 없었다. 결국 소다는 아내의 장례를 지켜보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사히 신문의 한 기자가 1960년 소다의 방한 허용을 촉구하는 칼럼을 싣고, 한국에서도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이제는 성인이 된 보육원 출신 인사들이 힘을 합쳐 소다의 방한을 주선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소다는 1961년 5월 특별기편으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소다는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받고 영락보린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다가 이듬해 3월 28일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95세의 일이었다.
그의 장례는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대한민국 각계각층 2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뤄졌다. 그의 추도식이 서울 YMCA 강당에서 거행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놈 장례식을 치뤄준다고 전국에서 반대 전화와 협박장이 날아들기도 했다. 당시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여론이 들끓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모두 무사히 치뤄졌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소다 가이치에게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소다의 묘는 현재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다. 수많은 서양인 묘비들 사이에서, 소다는 그의 아내 우에노와 함께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그의 비석에는 '고아(孤兒)의 자부(慈父)'라고 적혀있다.
소다 부부의 손에 길러진 고아들은 소다와 우에노를 '하늘 아버지, 하늘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번이라도 소다를 만나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는 일본인이었지만, 그 어떤 조선인보다 조선을 사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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