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식 그리웠지” 말하지 마세요…매일 먹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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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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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제의 ‘경계인’

토론토에 한국산 혹은 한국식 먹거리가 부쩍 늘었다. 김, 삼겹살 등에 이어 몇년 전에는 한국산 소주도 합류했다. 백세주, 막걸리 등이 그 뒤를 이었고 최근엔 캐나다 주류회사가 ‘소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소주가 위스키, 맥주, 와인처럼 술의 한 종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K드라마·K팝 세계적 흥행에
삼겹살 등 한국음식도 ‘대세’
이젠 많은 외국인이 즐겨 찾아

옛날엔 김치 냄새에 긴장했지만
지금은 “청국장만 안 끓이면 돼”
K푸드 흥행에 이미지도 달라져

이곳은 한국보다 음식도 비싸고
식재료 사기도 약간 까다롭지만
그래도 한식 챙겨 먹기 ‘쉬운 편’
“뭐 먹고 싶어?”는 넣어두세요

1990년대 중후반 나는 뉴욕을 자주 드나들었다. 시사주간지 문화부에서 미술과 음악 기사를 주로 쓰던 기자에게 뉴욕만큼 매력적인 출장지도 흔치 않았다. 뉴욕은 말 그대로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나는 그 무대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예술가를 여럿 만났다. 백남준, 홍혜경, 이상남, 조숙진, 강익중, 니키리 같은 뉴욕 예술계의 스타들이었다. 나는 뉴욕에 갈 때마다 한국인 예술가들을 1~2명 만나곤 했는데, 인터뷰는 식사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놀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들이 식사를 하자고 하면 그것은 한국식당에 가는 것을 의미했다. 누구든 예외는 없었다. 뉴욕에서 수십년을 활동해온 예술가도 마찬가지였다. 맨해튼32가 코리아타운(요즘은 K타운이라 불린다)의 한국식당을 찾아가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한국에서 온 사람을 미국식당이 아니라 한국식당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이상했고, 그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더 이상해 보였다.

취재차 만난 유명 예술가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뉴욕에서 만난 한국사람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식사를 하자”고 하면 한국식당을 찾아갔다. 뉴욕까지 가서 한국식당 아닌 곳에서 식사를 한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뉴욕에 간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설렁탕이냐, 순두부냐 하는 것밖에 없었다. 먹는 것에 관한 한 뉴욕은 서울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떤 식당의 음식 맛은 서울에서도 찾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다. 그래도 명색이 해외출장인데, 설렁탕·순두부·삼겹살·불고기·보쌈 같은 한국음식만 먹었으니 음식 먹는 걸로 보자면 국내출장인지, 해외출장인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캐나다에 이민을 와서 사는 지금이 바로 그렇다. 집에서는 당연히 한국음식을 먹고, 바깥에서도 예외없이 한국식당을 애용하니 하는 말이다.

토론토에 처음 살러왔을 때 임대 아파트를 소개해준 이는 말했다. “이 아파트는 한국식품점과 가까워요.” 살기가 그만큼 편리하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식품점과의 거리는 어느 지역에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요 고려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K타운은 음식과 가장 관련이 깊다고 보면 된다. 최소 하루 한 끼 이상은 한식으로 밥을 먹는 한국사람으로서는 한국식품점과 한국식당이 가까이 있어야 살기에 편하다. 한국사람이 있어서 한국식품점이 생겨났고, 한국식품점이 있어서 한국사람들은 더 모여들었다. 한국식당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버팔로에서 국경을 넘어 2시간 이상 자동차를 몰고 토론토 한국식품점으로 시장을 보러 오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한국인이 별로 없는 캐나다 다른 주에서 온 어떤 사람은 감자탕을 사들고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먹는 것과 관련해 한국과 다른 점이라면 두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첫째는 토론토에서는 장을 두 번 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고추장과 된장 같은 것을 사려면 한국식품점에 반드시 들러야 한다. 그래도 외국살이를 하고 있으니 이곳 식품점에 가야 구할 수 있는 것도 많다. 뉴욕이나 LA 같은 미국 큰 도시의 한국식품점에서라면 ‘원스톱 쇼핑’이 가능할 테지만 토론토는 아직 그 수준까지는 아니다.

두 번째는 이곳 식당의 음식 가격이 한국에 비해 많이 비싸다는 것이다. 한국식당도 마찬가지다. 이민 초창기만 해도 돈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니 한국식당에서 밥을 사먹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보다 두 배 가까이 비싼 음식값이 부담스러웠고, 15%에 달하는 팁 문화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동창회 같은 모임은 주로 한국식당에서 열리는데, 음식은 뷔페식으로 나온다. 참석 초기에 흥미로워 보였던 것은 참석자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음식컨테이너에 남김없이 담아 집에 들고 간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식당 음식이 아무리 비싸도 그렇지, 무슨 궁상인가’ 싶었으나 그 문화에 곧 익숙해졌다. 그것은 궁상을 떠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음식으로 한 끼를 더 해결하고 음식 쓰레기도 만들지 않는 훌륭한 문화였다.

한국에서 온 이민자라면 초기에 거의 예외없이 거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 하나 있다. 가까운 공원에 나가 삼겹살을 굽는 일이다. 처음에는 공원에서 고기를 굽는다는 것이 신기해서 많이들 나가기도 했고, 바깥에 나가 사먹기가 어려우니 ‘외식’을 그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밥을 먹은 뒤 ‘개운하다’는 느낌을 가진 것은 토론토에 살면서부터였다. 이민 초창기에 이곳 문화를 배우고 적응하려고 샌드위치숍과 빵집에 나가서 일을 했던 적이 있다. 두 곳 모두 외국인 손님을 상대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매일 메뉴를 바꿔가며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늘 뛰어다녀야 할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었다. 육체노동을 처음으로 하는 터라 정신이 멍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기는 했으나 허기를 끄기 위해 그저 삼키는 기분이었다.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샌드위치숍에서는 7명이 함께 일을 했는데, 주인도 종업원도 모두 한국사람이었다. 점심 장사를 마치면 주방에 모여 앉아 각자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어느 날 여성 동료 한 사람이 “샌드위치가 지겨우니 밥을 해먹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기밥솥은 있었고, 돈을 모아서 한국식품점에서 반찬 몇 가지를 사왔다. 멸치볶음이나 김 같은 냄새가 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최고는 쌈장이었다. 가게에는 상추와 배추가 많았다.

어느 날 한참을 먹고 있는데, 동료 한 사람이 말했다. “이제 그만 먹어요. 그러다가 정말 배 터지겠네.” 사실이 그랬다. 주방에서 변변한 식탁도 없이 플라스틱 우유 박스 위에 앉아서 하는 식사였으나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맛있게 많이 먹었던 적도 드문 것 같다. 고기 한 점, 국 한 그릇 없는 단출한 차림이었지만 쌀밥과 상추와 쌈장만으로도 성찬이었다. 그걸 먹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 가게를 열고 밥벌이를 제대로 하게 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일찍부터 가게에 나가 일을 하면 점심은 식당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밥을 먹으러 가는 곳은 늘 한국식당이었다. 아무리 맛있는 다른 식당이 있다 해도 가기가 꺼려졌다. 한국음식을 먹어야 비로소 밥을 먹은 것 같고, 개운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음식을 먹으면 내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기는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가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이다 보니 특이한 음식 냄새를 풍길까 봐 서로가 늘 조심하는 편이다. 냄새에 민감한 사람도 많다. 한국사람들은 김치에 들어 있는 생마늘 때문에 각별히 주의를 하는데, 요즘은 예전처럼 긴장하지는 않는다. 한국음식에 대한 외국사람들의 호감도가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이다. K드라마, K팝에 이어 지금은 K푸드까지 뜨고 있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로 하여금 한국음식에 대해 관심을 넘어 호감을 갖게 한 것은 역시 한국 드라마였다. 출발점은 2000년대 초중반에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 <대장금>은 중국 대륙을 넘어 캐나다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다. 초창기에 K드라마의 인기를 주도한 사람들은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이었다. 드라마의 수혜를 가장 입은 곳은 한국 식당과 식품점들이다. 토론토 한국식당의 주고객은 더 이상 한국사람들이 아니다. 드라마에 매혹된 외국인들이 한국식당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감자탕’을 대표적인 한국음식으로 띄우기도 했다. 이제는 한국식당들이 외국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들쩍지근함’ 때문에 한국식당의 음식이 도리어 한국사람들 입에 맞지 않는 아이러니도 생겨난다.

한국식품점도 이제는 한국 손님만으로는 유지할 수가 없다. 어느 곳이든 외국 손님 비율은 30%가 넘고, 어떤 지역 한국식품점은 절반이 넘는다. 한국식품점을 찾는 외국인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한국식품점과 비슷한 품목을 취급하면서도 규모가 크고 가격이 좋은 중국식품점도 여럿 있으나 일부러 한국식품점을 찾는 중국인이 많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사람들은 좀 더 싼 가격을 찾아 중국식품점에 가고, 중국사람들은 한국의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한국식품점을 찾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외국인들에게 한국음식이 ‘주식’은 아니겠으나, 이제는 한국음식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집을 사고팔 때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한국인들이 집을 내놓을 때면 한동안 한국음식을 해먹을 수가 없었다. 한국음식 특유의 냄새가 집을 보러오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동산 중개인들이 “청국장만 안 끓이면 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외국사람들이 한국음식을 좋아하고 냄새에도 익숙해졌다는 얘기다.

토론토의 대형 식품점에도 한국 먹거리가 밀려드는 추세이다. 대형 식품점 어디에서나 한국산 라면이나 과자는 쉽게 볼 수 있다. 가장 큰 매장인 코스트코에도 10년 전부터 한국음식들이 하나둘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김치와 김, 만두, 유자차 같은 것까지 눈에 띈다. 한국식품점에서만 볼 수 있었던 삼겹살도 있고, 한국식 LA갈비도 있고, 코리안 스타일이라고 적어놓은 불고기감도 있다. 한국음식에 ‘인이 박여서’ 한국음식을 찾는 이들이, 이제는 한국사람들만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지 않아도, 먹는 음식으로 말하자면 이곳 한국사람이 사는 삶은 한국과 ‘다른 삶’이 아니었다. 지금은 K푸드 인기가 급상승하다 보니 ‘활어회’를 제외하고 먹지 못하는 한국음식은 없다. 문화강국의 위력을 음식에서도 실감하고 있다. 북미 큰 도시에 살다가 한국에 가끔씩 나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한국음식 그리웠지? 뭐 먹고 싶어?” 같은 질문은 더 이상 하지 말기 바란다. 촌스러운 질문이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107092018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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