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 반란 피해자 김광해 중령. 끝나지 않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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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맥가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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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광해 예비역 중령은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반란군 진압 진영이던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전속부관(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는 그날 밤 육군본부를 기습한 반란군(1공수여단)한테 총격을 받고 머리와 얼굴, 복부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김씨는 현재 서울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1979년 12월12일 저녁 7시 김광해 중령은 퇴근했다가 ‘총장 유고’ 소식을 듣고 육군본부(육본)로 달려갔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최규하 대통령이 승인을 거부해서 아직 성공하지 못한 상태라는 보고를 본부 연락장교로부터 받았다.” 육본 벙커에는 윤성민 참모차장과 문홍구 합참작전본부장, 하소곤 작전참모부장, 김진기 헌병감, 안종훈 군수참모부장, 천주원 인사참모부장 등 10여 명이 모여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다.

육군의 병력 출동과 이동명령 권한은 하소곤 작전참모부장에게 있었다. 하 작전참모부장은 육본 벙커에서 반란군을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시로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과 통화하며 진압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하지만 진압 주력 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와 특전사령부 주요 장교들이 이미 전두환씨를 정점으로 한 사조직 ‘하나회’ 소속이었다.

자정 무렵 육본 벙커에 머물던 장군들은 서울 필동 수도경비사령관실로 이동했다. 이들이 벙커를 떠난 직후 국방부와 육본 정문에서 콩 볶는 듯한 총성이 울렸다. 반란에 가담한 박희도 1공수여단장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국방부 장관과 육본 참모 장성들을 체포하기 위해 기습했다. “장성들이 필동으로 가면서 나에게 육본을 사수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병력이라야 장군 보좌관과 병사 40여 명밖에 없었지만 모두 소집해 경계를 강화토록 했다. 자정 무렵 1공수여단이 무차별 난사하며 군용 차량 40여 대로 돌진해 들어왔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순간 총알이 쏟아졌다.”

김 중령은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 국방부와 육본을 무력으로 제압한 1공수여단 병력은 모든 방을 샅샅이 뒤졌다. 반란 진압군 측 장성들과 사라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날 새벽 반란군은 국방부 건물의 한 방에 숨어 있던 노 국방부 장관을 찾아내 서울 삼청동에 있던 최규하 대통령 앞으로 끌고 갔다. 쿠데타 사후 재가(정승화 총장 연행 승인)를 얻어내기 위한 압박 순서였다. 이로써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12·12 쿠데타는 형식적으로 완벽히 마무리됐다.

총상을 입은 김광해 중령은 육본 당번병에게 업혀 삼각지 근처 한 민가로 옮겨졌다. “병원으로 데려가면 반란군에 발각돼 죽을 것이라고 여겨 민가 문을 두드려 응급조치를 부탁했다고 하더라. 의식이 돌아온 뒤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 근처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서는 군복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환자의 입원을 내켜하지 않았다. 김 중령은 신원 확인을 거부했다. “내가 모시던 하소곤 작전참모부장이 반란군 총격을 받고 생사 불명 상태라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발견되면 즉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들이 출근해 대책회의를 연 뒤에야 어렵게 가명으로 입원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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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총상이라 가명으로 입원 치료해 국뻥부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 했고, 아직 군사반란 피해자 다수가 생존해 있지만 국뻥부 보훈처가 무관심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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