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직전 영국 총리 '체임벌린'에 대한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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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왕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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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 재임 : 1937 ~ 1940)

- 기업인 출신 재무관료(경제통)

- 1930년대 세계대공황을 이후 당시 재무장관으로써 대대적인 개혁으로 영국 경제 회복에 기여함

- 그러나 뭔휀 협정을 계기로 최악의 총리라는 평가를 받음


요즘 동북아 정세가 심상잖게 전개되는 시국에

소위 한반도 평화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이나 응징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자들이 활개치는 이 현실 속에서..

전쟁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전쟁을 정당화 시킬려는 그 사상적 토대를 즉, 정신적 뿌리를 쳐야한다고 느꼈습니다.

강경책이나 전쟁도 불사해야 하는 자들의 논리가 바로 2차대전 총리 영국 수상 '체임벌린' 사례입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유화책을 폄훼하는 논리로 가끔씩 세계사적 사례를 들고오는것이 '체임벌린' 사례로 언급됩니다.


이제까지 서구권에서는 체임벌린이 무능의 대명사라고 찍힌 영국 총리였습니다.  오늘날 서구권의 지도자들이 외교 기조를 유화책 스럽게 펼치는듯하게 보이면 반대 정치 세력들이 '체임벌린같다'라고 비판하는건 기본이고


유화책을 펼치는 지도자들은 '제2의 체임벌린'이라고 비칠까봐 눈치를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62년 쿠바 미사일 사태때.. 미국과 소련이 전쟁 중이였을때 미국의 군부로 대표되는 강경파들이 유화적인 당시 케네디 대통령에게 '케네디 아버지(당시 주 영 미국 대사로 뭔헨 협정에 관여) 및 체임벌린 사례'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언급했었으니까요.


만일 체임벌린 사례 되풀이 하지 말자는 이유로 그 당시 미.소 간에 전쟁이 났으면 지금 어찌 될까요? 핵 전쟁이고 이는 인류 공멸로 직결되었을 것입니다.


과연 체임벌린은 바보였고 무능의 대명사였을까?

- 체임벌린이 오명을 쓴데에는 이후 후임 총리인 윈스턴 처칠의 혹평도 한몫(한마디로 뒤집어 씌운점도 있음)

- 그리고 그당시 1차대전의 휴유증으로 그리고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전쟁을 준비하기에는 마땅치 않음

- 1차대전 동맹국이였던 이탈리아, 일본, 러시아(소련)이 적대적으로 돌아섬

- 그 당시 영국이 전쟁을 대비할려면 군비를 확충해야 해야하는데 군비를 확충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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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니 체임벌린 입장에서는 유화책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당시 영국이 제대로된 군비도 확충안되었는데 만일 무작정강경책을 쓰다가  전쟁이 더 빨리 발발하면 영국 입장에서는 더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되었을꺼라는 평가도 떠오르는 상황입니다. (체임벌린은 나치 독일을 경계를 안한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나치 독일의 그 당시 행보에 대해서 경계했었고 독일의 팽창에 대비해서 군비 강화를 지시하기도 했죠)


물론 체임벌린이 유화책을 이루기 위해 행해졌던 디테일한 과정은 비판받을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를 고수하려는 그 기조는 저는 틀리지 않았다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한반도 평화를 강조하면서 평화가 곧 경제라는 말은 많이 합니다. 체임벌린은 경제통으로서 그 당시 경제대공황의 여파를 극복하는것도 힘든 상황에서 전쟁의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 당연히 경제에 악영향이 올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죠


오늘날 전쟁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강경책을 강조하는 부류들은 입버릇 처럼 체임벌린 사례를 언급합니다. 그렇게 체임벌린 사례를 언급하는 강경론자에게 케네디는 1차 대전 당시 각국의 오판으로 세계 대전이라는 참상을 겪었던 '8월의 총'이라는 책 사례로 반박했습니다.

과거의 교훈은 새겨야 하지만 맥락과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단순한 대입은 맹동주의를 낳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평화가 답입니다. 한반도를 보듯이요. 그래서 저는 체임벌린 사례도 재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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