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아재의 청춘과 축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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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청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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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란색과 파란색을 좋아하고,

K리그를 사랑하는,

경기도에 거주하는, 

평범한 40대 직장인입니다.


요 며칠 사이에,

황선홍 감독이 욕을 어마어마하게 먹는 상황에,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남겨봅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차범근호는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지속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며,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게 됩니다.

저도 그 시기 즈음에, 잠실주경기장으로 아시아 최종예선을 직 관하게 되면서 축구의 묘미에 빠지게 되고,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황선홍 선수도 좋아하게 됩니다.


그 뒤로 자연스레 황선홍 선수의 소속팀인 포항스틸러스도 좋아하게 되고, 

유니폼(그 당시 포항스틸러스 백넘버 18번, 외국인 선수 '율리안' 유니폼)도 구매하여 원정경기 때 서포터석에서 몇 번 응원도 했던 거 같습니다.


기억이 뒤죽박죽이기는 한데, 황선홍 선수는 그 뒤로 제2리그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백넘버 35번)을 하고, 이적한 그 해 바로 득점왕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한국인 제2리거로는 김도훈(비셀고베), 유상철(요코하마 마리노스), 노정윤(세레소 오사카), 홍명보(가시와 레이스) 정도만 기억이 나네요. 


황선홍 선수의 제2리그 경기를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한 게 꽤 있었는데, 아쉽게도 몇 년전에 와이프의 성화로 알차게 모았던 축구잡지며, 경기 녹화 테이프며 모두 버렸습니다. 

천안에 축구센터가 건립된다는데 유물로 기증했으면 꽤 의미가 있는 자료가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훗날 황선홍 선수는 수원삼성블루윙즈로 백넘버 20번을 달고 K리그로 다시 돌아옵니다.


아무튼, 인생의 진로조차 바꾼 축구에 대한 사랑은 뭔 일인지 군대를 다녀온 뒤로는 급격하게 식어버렸습니다.


20여년이 훌쩍 넘어서, 

축구선수가 꿈인 사랑스러운 아들은,

(초등학생 저학년이라 꿈이 자주 바뀌기는 합니다만)

원판형 반월상 연골 파열로 무릎 수술을 하게 되고, 그런 아들에게 힘이 되고자 K리그 직관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과 함께 FC서울 팬이 되었고, 이게 뭐랄까 지나간 청춘의 한 조각을 아들이 다시 맞춰주고 찾아준 느낌이랄까? 


소시적에 축구를 좋아하게 되면서, 스포츠 마케팅 분야의 일이 하고 싶어져 대학도 경영학과에 지원하게 되면서, 앞 부분에서 서술한 것처럼 어찌보먼 인생의 방향이 바뀌게 된 계기가 되었던거죠. 

원래는 되도 않는 정외과를 지원하려고 했었습니다. 스포츠 마케팅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전공을 살린 밥벌이는 하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축구를 다시 좋아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K리그를 좋아합니다.

아들 덕분에 청춘을 되찾은 기분입니다. 

주말이면 아들과 함께 찾는 축구장에서 고레고레 소리도 지르고, 같은 유니폼을 입고 함께 응원하는,

어쩌면, 아빠가 좋아하는 걸 똑같이 좋아하는 아들을 보며, 

지나간 내 청춘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작을 황선홍 선수로 했으니, 두서없이 긴 글의 마무리도 황선홍 선수로 해야 할 듯 싶습니다.


그의 최근 행보가 욕을 먹어야 한다면, 마땅히 욕을 먹어야겠지만, 그의 선수 시절 커리어까지 부정당하거나, 인신공격 성격의 선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부디, 미래의 대한민국 축구의 디딤돌이 되고 역사가 될 어린선수들을 아껴주는 황선홍 감독이 되길 바랍니다.



p.s1) 재미없고 긴 글입니다. 스킵하시고 사진만 보세요.

p.s2) 지금은 아들과 황의조 선수 팬입니다. 그의 EPL 진출을 응원합니다.

p.s3) 유니폼 사진 설명입니다. 왼쪽상단에서 시계방향으로,

황선홍 국대, 박지성 국대, 손흥민 국대, 천성훈 인천, 일류첸코 서울, 배준호 대전, 황의조 서울, 이승우 수원

p.s4) '99.3월 김포공항에서 황선홍 선수와 함께.

p.s5)본가에 아직 남아있는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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