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그늘을 읽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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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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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얼마전에 그동안 써놓은 일기 같은 글을 묶어서 책을 냈습니다. 당연히 출판사에서 내줄리는 없고 자비로 출판했는데, 팔려는 생각은 없고, 팔아도 돈이 안됩니다만, 다만 먼 미래에 제 아이들에게 제가 어떤 생각으로 세상 살았는지는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흔적 같이 남기려고 출간했습니다. 출간하고 보니 심지어 오탈자도 한자 있더군요. 하하;;;


그 책의 214 - 222 페이지의 글을 올려 봅니다. 어제 공감해주신 글과 연관이 조금 있기도 하고, 결국 누군가의 그늘을 읽는 다는 것은 나를 돌아보고 돌보는 일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글에 나온 내용은 몇년전 상황이고 지금은 주민이 합심해서 개선되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누군가의 그늘을 읽는 일



가끔 지나가는 길에 마주하는 교보문고 광화문지점 글귀를 어느 날 마주하면서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이라는 문구에서 2017년 6월 7일, 그날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별할 것 없던 2017년 6월 7일 그날은, 오후에 받은 한 통의 이메일로 기억 속에서 잊기 어려운 날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공동주택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감사로서 마을 역할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을 전혀 모르던 나는 이웃의 생각이라도 바르게 듣자는 마음에 연락처를 전 세대와 관리 주체 직원 모두에게 공개해둔 상태였다. 가끔은 만용에 가까운 이 일을 후회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그렇게 생각 없이 내 연락처를 모두에게 공개한 덕분에 나는 마을 역할에서 조금 덜 실패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본인을 내가 사는 공동주택에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아빠의 딸이라고 밝힌 분이 보내온 메일은 한 줄 한 줄이 읽기에 마음 아프고 부끄러운 글이었다. 아직도 이메일을 간직하고 있는데, 장문의 이메일 중에서 몇 줄을 가져오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 아빠가 OO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계셔요..

작년에 아빠가 심하게 아프신 일이 있는데요.. 그게 더위 때문에 그랬다고 병원에서 알았어요.. 한번도 힘들다는 말씀 안 하신 아빠인데.. 작년에는 참 많이 힘드셨는가봐요..

더위 먹어서 그렇다고 괜찮다고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아직 제가 학교를 다니느라 도움이 못되어서 부끄러운데요.. 우연히 연락처를 알게 되어서요.. 아파트에서 간부님들께서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많이 고민하다가 아빠가 너무 힘들게 올 여름도 지내실까봐 너무 걱정이 되어서어요.. 아빠 딸로 살면서 아빠가 항상 당당하신 모습만 봤었는데.. 이렇게 밖에 아빠에게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편지 보낸 분이 죄송하다는 말로 맺는 이메일을 보고 나는 스스로 가슴을 쳤다. 10년 넘게 사는 곳 경비실에 냉방시설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날 처음 알았다. 그리고 잠시 막막해졌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일이 없겠지만, 공동주택의 행정절차는 사뭇 복잡하다. 특히나 공용부분 (경비실, 놀이터, 17종류의 주민 공용시설 등)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편지를 받고 현황을 파악했던 날은 6월이었지만, 그해 여름의 더위에 대비하기에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이틀 동안 12개 경비초소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분을 초소별로 찾아뵙고 사과부터 드렸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한가지 약속과 부탁도 드렸다. 한가지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해 안에 경비초소에 냉방시설을 도입하겠다는 약속이었고, 부탁은 상의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꼭 연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느 일방의 부탁이나 요청으로 맺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진심과 선의가 신뢰로 맺어지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편지 한 통으로 시작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실무적인 절차를 실행했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올바르게 일을 해도 어려운 자리이다. 서로 간 다른 이해관계의 중간 지점을 찾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양심을 내려놓고 제멋대로 하면 쉬운 역할일 수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함께 활동하는 그 당시 입주자대표회의에는 양심을 쉽게 내려놓은 분은 없었다. 입주자대표회의 어려운 처지를 알기에 모든 과정에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였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이웃에게 사실 알리기였는데, 소통을 시작한 이웃이 50세대, 100세대를 넘어가면서 모두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단지 경비실에 지금까지 냉방시설이 없습니다.”


세대를 방문해서 이렇게 말을 꺼내면 놀라지 않는 이웃이 없었다. 너무 모르고 있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이웃도 있었고, 태양광 사업을 하는 이웃은 경비실에 냉방장치 빨리 설치하고 태양광 도입하는 것을 돕겠다는 분도 있었다. 그중에서 생각나는 한 분은 그 자리에서 경비실 12곳 전부에 설치할 냉방장치를 기증하겠다는 분이었다. 여름 더위가 막 시작하는 6월 중순이라서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고, 공동주택에서 업무 절차가 얼마나 많은 과정으로 인해서 어려운 부분이 있는지를 잘 아는 이웃이었다.


처음 막막했던 마음은 이웃집을 100세대 방문을 마치던 시점에서 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들은 이웃의 의견을 그대로 정리해서 입주자대표회의에 가지고 갔다. 2017년 6월 7일에 받았던 편지도 내용 빠짐없이 전해드렸고, 시기적절하게 서울시로부터 다음 내용과 같은 공문까지 올바른 판단에 힘을 실어주었다.


“「공동주택 관리조례」 제6조의2 및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 제62조 제7항에 경비원의 처우개선에 관한 내용을 정하고 있으며,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한 「산업 보건 기준에 관한 규칙」 제560조에서도 “사업자는 고열, 한냉, 다습작업이 실내인 경우에 냉난방 또는 통풍을 위하여 적절한 온도, 습도 조절장치를 설치하여야 한다.”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입주자대표회의 회장님께 경비원의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도움을 주실 것을 공문으로 협조요청 드렸음을 알려드립니다.”


같은 해 여름 나는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아마도 편지를 보낸 분의 아버지인 것 같았다. 지난해 여름 경비초소에서 여름 한낮 더위에 잠시 혼절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경비실에 냉방시설 설치가 되어서 감사하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편지 보낸 따님이 사랑하는 아버님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차마 따님 되는 분이 편지를 보내서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다는 말씀을 전할 수는 없었다. 따님이 당신의 고통으로 아파했다는 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연락에 감사하다는 인사 뒤 통화를 마쳤다.


특별하게 잘 지은 경비초소가 아니라면 대부분 공동주택 경비실의 여름철 실내 온도는 일기예보 온도보다 10% 이상 더 높다. 창문과 문을 열어 놓아도 온도가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다. 한번은 휴가로 비어 있는 초소에서 온도계로 여름철 실내 온도 측정을 해본 일이 있었는데 최고온도가 42℃ 가까이 찍혀 있었다. 그날 일기예보 상 온도는 서울 33℃였던 날이다. 직접 측정해보고 눈으로 온도계 숫자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근무환경이었다. 냉방시설 설치를 마무리 한 일에 작은 보람을 느꼈다.


한 번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던 입주자대표회의 활동은 다음 해부터 2020년 6월까지 두 번째 임기를 회장이라는 역할로 수행하게 되었다. 지난여름의 혹독한 환경을 직접 확인했기에, 겨울이나 봄, 가을에는 어려움이 없을지도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용히 관리 주체와 상의하여 경비초소에서 근무를 서 보았다. 요란하게 떠들면서 근무를 한 번 한 뒤에, 두 번 더 근무하면서 현장의 상황을 확인해보았다.


24시간 동안 경비초소와 정문 근무, 야간 순찰을 일과 시간표대로 하고 나니, 밖에서 보는 것보다 노동의 강도가 높았다. 특히 야간 시간에 잠을 자다가 순찰을 나가야 하는 여건이나, 휴식 시간에도 찾아오는 택배 보관이나 긴급한 일들로 제대로 된 휴식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에는 벌레에, 겨울에는 추위에 수면시간에도 잠자리가 편할 수는 없었다. 여러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에는 구조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새로운 기수의 입주자대표회의와 함께 조금씩 개선할 수 있었다.


공동주택 관리 주체에는 다양한 근무자가 있는데, 경비원 이외에도 청소근로자, 기전실 근무자와 같이 매일 공동주택의 시설 및 환경 관리를 위해서 일하는 분들도 있다. 그리고 짐작하겠지만, 사회적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은 들여다보면 생각하지도 못한 그늘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급수펌프가 가동되는 시끄러운 환경은 둘째치고, 샤워하면서 주위로부터 몸을 가릴 부스조차 없는 여건이었다. 경비초소에서 근무했던 날 땀에 흠뻑 젖어서 이 상태에서 잠시 샤워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생각이 미쳐서 알아본 직원 휴게시설과 샤워 시설은 나에게 또 하나의 냉방시설 없는 경비초소 같았다. 다행히 문제 인식과 해결에 뜻을 같이하는 입주자대표회의 덕분에 문제를 해결하고 지금은 최소한의 샤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은 되었다. 나는 임기가 끝났지만, 당시 함께 활동했던 입주자대표회의는 지금도 선한 역할을 이어가고 있는데, 마을공동체 활동에서 <모두를 위한> 프로그램을 실천하려 애쓰시는 모습이 늘 고맙다. 2021년에 실행하는 에너지자립마을 사업에서도 가장 먼저 경비초소 노후화된 난방시설과 눈을 아프게 하는 낡은 조명시설 개선사업을 실천한다는 말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2017년 6월 7일 받았던 한 통의 편지에 올바른 실천으로 답하기 위해서 4년 동안 나름대로 애써보았지만, 지나고 보면 온전하게 마치지 못한 일들도 있다. 나는 과연 그 편지에 올바른 답을 실천 해왔던 것일까? 라는 생각으로 입주자대표회의 임기를 마치던 즈음에 우체통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그 편지는 단지에서 청소 근로를 하는 한 어머님의 편지였는데, 글은 위와 같이 시작하였다. 청소근로자의 어려운 점을 살피고 근무여건 개선을 위해서 했던 몇 가지 일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그 글은 입주자대표회의라는 마을활동을 마치던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분의 편지 한 통은 나에게, 온전히 다 해내지는 못했어도, 많이 틀린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는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지나고 보면 모두가 신기한 인연이다. 처음 이메일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되었던 일이 또 다른 우편함 편지글 하나로 조용히 맺음하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그 문장의 원래 의미를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내가 2017년부터 4년 동안 마을에서 배운 누군가의 그늘을 읽는 일은 눈으로 살피기보다는 피부로 체감하는 일이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의 차가움을 함께 경험하며 고통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과정이었다. 온전히 그 속에 들어갔을 때에서야 약간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그늘을 읽는 일에는 생각보다도 더 큰 힘이 있다. 그 힘을 마을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는 이웃에게서 볼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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