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스포) 소울메이트를 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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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사랑하지만... 서로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밀어내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닮았지만, 너무나도 달랐던…
서로를 동경하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던 사람들…
영화 속 미소와 하은처럼, 제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미소와 하은처럼, 저는 그 친구를 전학 온 초등학교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아버지 사업이 괜찮게 되던 시기였고, 부모님은 제가 이전에 살던 동네보다 좀더 좋은 동네로 옮기고 싶어해서 당시 중산층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신축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본디 사회성이 좋지 않던 차라 적응에 애를 먹는 저에게 그 친구는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소년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미소와 하은이 서로 퍽 다른 사람이었던 것 처럼, 저도 그와는 퍽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키가 크고, 활동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저는 당시 반에서 가장 작고 왜소한 축에 들었고, 병약했으며, 운동을 하기보다는 앉아서 책을 읽는걸 좋아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서로 달랐던 미소와 하은이 서로 그림을 그리며 이어진 것 처럼, 그와 나를 이어준 것은 과학, 특히 항공우주 분야에 대한 관심사였습니다.
특히 저는 비행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죠. 제가 매일같이 우주나 비행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비행기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고무동력기나 종이 글라이더, 연 같은 온갖 것들을 만들어 날려대는 동안, 그 모든걸 함께 하면서 그 친구도 저만큼이나 비행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 미소와 하은이 그랬듯이,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우리가 서로의 벽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경제적 계급의 벽이 우리를 갈라놓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사실 그 친구는 가정형편이 정말 좋지 않았습니다. 그의 집안에는 말기암 투병을 하면서도 술을 끊지 못하는 주정뱅이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밤낮없이 온갖 일을 다 하셨지만 그 돈은 결국 아버지의 치료비로 모조리 흘러들어 갔으며, 그렇기에 늘 집안 분위기는 무거웠고, 그의 누나는 그런 집이 싫어서 가출과 방황을 반복하다 고졸하자마자 연인과 동거를 선언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병수발은 오롯히 그의 몫이었지만 그는 어머니 때문에 힘든 내색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성적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저는 비교적 성적이 괜찮았고, 집안 상황도 당시엔 괜찮았었습니다. 그런 서로간의 배경차이가 조금씩 벌어지면서, 그는 조금씩 저에게 위화감을 느끼곤 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그가 살던 동네가 재개발로 철거가 되면서 그가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네 집은 세입자였기에 이주비가 약간 나온거 말고는 별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학교를 서로 다른학교로 진학하면서 저와 그 친구는 완전히 서로 연락이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미소와 하은이 다시 만나기 까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던 것처럼, 내가 그와 다시 재회를 하게 된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약 15년 뒤, 신촌의 한 치킨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옆자리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그를 제가 알아보았고, 그와 동석하여 같이 술을 마시면서 지나간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막연히 그가 성적이 되지 않아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그는 성적이 정말 낮아도 갈 수 있는 인문계고를 수소문하여 입학했고, 그 학교에서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내신성적으로 수시전형을 써서 꽤 괜찮게 평가받는 대학을 진학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긴 투병끝에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의 의료비 지출이 없어지자 집안경제상황도 빠르게 좋아졌고, 아버지의 보험금을 시드머니로 어머니가 했던 몇 건의 투자가 성공하면서 현재는 어머니가 작은 건물을 한 채 가진 건물주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월세수입 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할 만큼 안정이 되자, 이 친구도 자신의 진로에만 매진할 수 있었고, 당시 그는 대학원에 들어가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웃으면서 조심스레 묻는 그에게, 저는 사실 별로 해줄 말 이 없었습니다.
재미있게도 그 당시 제 상황은 그 친구를 처음에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반대로 역전되어 있었습니다. 고2,3 무렵쯤 저희집은 아버지 사업이 안 풀리기 시작해서, 대학에 들어간 뒤로는 아버지 사업 빚으로, 살던 집도 경매로 날리고, 아버지는 매일 술만 드시고, 어머니가 나가서 돈을 버시던 상황이었습니다. 저와 제 동생의 학비는 커녕, 생활비조차 쪼들리던 상황이라 저는 학교를 휴복학을 반복하며 돈을 벌어야 했고, 제 동생도 학교를 다니는 내내 알바를 병행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졸업은 했지만, 대단찮은 스펙으로 나이만 많이 먹은 제가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고, 당시에 150만원 정도 받는 임시직 일자리에서 일을 하며 여기저기 이력서를 쑤셔넣고 있었습니다.
서로 뒤바뀐 처지에서 달라진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는, 서로에 대한 연민과 동경, 과거에 주고 받은 오랜 감정들이 뒤엃힌 눈으로 서로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니가 좀 더 잘 됐을 줄 알았어. 물론 잘 된다는 것도 주관적인 말이지만… 우리 같이 비행기 만들던 거 기억나? 그때 너가 읽던 책들… 네가 나한테 해준 말들… 그런 것들이 내가 계속 이 길로 갈 수 있게 자극이 되어줬어… 난 너라면 너가 NASA라도 들어가려고 한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뭔가 연구자라도 됐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넌 나보다 훨씬 학구적이었는데…”
그날 그 말은 제게 참 아프게 들렸습니다. 꿈보다는 생존에 바빠 아등바등하는 내 앞에 갑자기 커다랗게 변한 어린시절의 벗이, 나를 동경했었다며 해주는 말은, 물론 안타까움에 하는 말인 것이 느껴졌음에도, 왜 너는 좀 더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느냐는 질타처럼 들렸고, 불행을 핑계삼아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온 게 아니냐는 비판처럼 들렸고, 어린시절 떠벌린 대단한 얘기들은 허풍이었냐는 힐난처럼 들렸습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느끼며 저는 화제를 돌리려고, 그 친구가 연구하는 테마가 뭔지를 물었고, 다행히 그 주제는 저도 어느정도 읽어서 알고있는 연구분야라서 즐거운 환담으로 자리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화제로도 이렇게 잘 통하는 우리가 서로 재회한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커보이는 그 친구가 부담스럽기도 했던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를 계기로 번호를 주고받은 우리는, 이후로도 연락을 이어갔지만 자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제 얄량한 자존심 탓이기도 했고, 그 친구가 바쁘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새로이 직장을 얻은 저도 바빠지면서 결국 그 친구와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 한 채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친구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대략 5년이 지난 뒤 였습니다.
오랜만에 전화가 왔고, 한번 보고 싶다는 말에 그의 집 근처에 있는 고기집에서 약속을 잡았습니다. 가게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그 친구는 당당하던 풍채는 온데간데 없고 엄청나게 살이 빠지고 왜소해진 상태였습니다. 왜 이렇게 말랐냐, 대체 무슨일이 있었냐고 묻자, 그는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더니 술을 한잔 마신뒤에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연구를 하면서 실험을 하다가 실험실에서 쓰러졌었다. 과로해서 그런가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후로 몸이 계속 안 좋고 저린 증세가 생기더라. 병원에서 뇌혈관이 수축하다가 없어지는 희귀질환을 진단받았다. 모야모야병이라고 하는데 현재로썬 뚜렷한 치료법이 없는 불치병이다. 스탠스 시술로 혈관을 확장해보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현재로써는 건강관리에 유의하며 진행을 늦추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여기까지 말을 잊고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는 마침내 오열하며 말했었죠. “왜 나냐? 세상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한테 이런일이 일어나는데? 난 정말 여기까지 힘들게 왔고 열심히 했다. 난 더 살고 싶어! 나 무서워…” 그렇게 목놓아 우는 친구에게 그때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같이 끌어앉고 우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저는 집에서 분가해서 낡은 빌라 꼭대기에 저렴한 전세집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꾸며야 한다는 구실로 그를 매일같이 불러들여 이것저것 고치고 꾸미고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더 이상 건강문제로 연구를 할 수 없어서 무료하던 친구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그 친구도 저도 예전부터 손으로 뭔가 만드는걸 좋아해서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소년시절 함께 비행기를 만들던 시절 같았지요.
그렇게 집이 고쳐진 후에는 자주 우리집에 들러서 퇴근 후 같이 저녁도 먹고, 술도 먹고, 잠도 자고가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엔 친구가 술마시는 걸 반대했지만, 어짜피 자신이 살날이 많지 않을텐데, 하루를 살더라도 즐겁게 하고 싶은거 하며 살고싶다는 친구의 말에 말릴 수 없어서 그냥 같이 술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서로 자주 만나면서 옛날얘기도 하고, 과학관련 주제로 토론도 하고, 시간도 자주 보내기를 약 3년여, 그 무렵부터 친구의 병세는 눈에 띄게 안 좋아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친구는 짜증이 잦아지고 괜한 일에도 쉽사리 화를 내곤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저희 어머님이 암진단을 받으시면서, 저는 자취집을 정리하고 본가로 들어가게 되었고 친구를 조금씩 덜 보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제가 자신을 밀어내기 시작한다고 느낀 것 같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부분도 없진 않았습니다. 예전보다 부쩍 예민해진 그를 거의 매일 감당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으니까요. 저는 그가 저를 더 이상 소중히 여기지 않고, 편한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저에게 사정도 있었습니다. 암 진단 이후 검사, 치료등을 이유로 자주 병원에 드나드시는 어머니를 제가 케어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날 자주 들러서 함께 먹곤 하던 전집에서 간만에 얼굴을 보며 술을 마시다, 술김에 오른 오기로 인해 사소한 정치적 견해차이로 크게 다투었고, 그 뒤로 우리는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며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는 제게 다시 카톡을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만나자. 같이 술 마시자. 저는 이제는 그가 좀 부담스러워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되도록 적게 만나려고 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어머님으로부터 연락도 받았습니다. 건강이 안 좋은데 술을 더 마시면 안되니 술을 안 마시는 조건으로 만나거나 만나는걸 자제해 달라. 만나게 되면 저는 술을 안 마시려고 했지만, 친구는 술을 안 사주면 화를 냈고, 술을 마시면 주사를 부렸습니다. 마치 예전에 돌아가신,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그의 아버지처럼… 이런 일이 반복 되면서 저는 이제 그가 보내는 카톡도 잘 받지 않고 되도록 답장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만나자고 청하는 친구를 핑계대며 뿌리치던 어느날, 하루는 이 친구가 제게 카톡으로 아주 모진말을 퍼부었습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간절히 보고 싶은데 너는 나를 밀어내기만 하느냐. 너는 사람을 위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이기적인 놈이다. 너는 너가 편할때만 사람을 보려고 한다. 예전부터 그랬다. 좋다. 어짜피 나는 죽을 테니 죽은뒤에나 연락해라.
저는 이제껏 담아두었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기적인건 너다. 너 역시 네가 필요하니 나를 찾는게 아니냐. 잘나가던 시절에는 너도 연락을 거의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암 걸린 부모수발 하는 내 사정은 안 중요하고, 너만 중요하냐. 너는 옹졸한 녀석이다.
한참 뒤, 그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그래 나는 옹졸한 녀석이야. 그러니 그만하자.”
그리고 다음날 저는 알고는 지냈지만, 연락은 자주하지 않던 초등학교 동창 친구를 통해 그 친구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친구로부터 빈소 위치를 받아적고, 일단 연락을 받자마자 빈소를 향해 가는 중이었만, 황망한 기분과 함께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바로 어제까지 카톡을 주고받은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죽어버리다니… 빈소에 도착하자 어머님은 저를 붙잡고 오열하며 무너지셨습니다. 간신히 어머님을 진정시키고 자초지종을 들어보았습니다. 어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기분이 좋지 않다며 함께 바람을 쐬러나가자고 어머님께 청하고는 집 근처 공원에 다녀오던 길에 차에 치어 숨졌다는 것입니다. 시간으로 짐작해보니, 저와 카톡으로 주고받은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하자, 가라앉히려 밖에 나갔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납골당에 다녀와서, 저는 친구를 회상하며 종이비행기 하나를 접어 라이터로 태웠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즐겨마시던 소주를 마시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저는 그 일로 제가 친구를 죽도록 내몬 것 같은 죄의식이 듭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저는 저의 소중했던 벗을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미소는 하은이 그리던 그림을 이어 그리며, 친구와의 만남을 추억하고, 그들이 함께 꾸었던 꿈을 되새깁니다. 자신의 얼굴에서 자신의 영혼의 벗이던 친구를 떠올리며… 이 장면을 보며 저는 그 친구와 제가 함께했었던 그 순간을 추억합니다. 뒤바뀐 처지를 살아가며, 때로는 동경하고, 때로는 밀어냈지만, 이제는 그리움으로 남은 그 친구. 정말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통해 그 친구를 생각하며인생의 버킷 리스트에 두 줄을 추가합니다.
1. 내 손으로 비행기를 만들어 날아보기
2. 그 비행기에 친구의 이름을 붙이기
Ps.
친구야. 생각해보니 네가 떠났던 것도 이런 따뜻한 봄날이었다. 곧 머지않아 너의 기일이 돌아오겠구나. 우리는 퍽 잘 맞는 친구였고, 비슷한 구석도 많았지만, 그러나 또 많이 다르기도 했었다. 네가 계속 하던 연구를 하며 너의 길을 계속 걸어갔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또한 그로 인해 어떻게 달라졌을까? 때때로 생각을 해본다.
이제는 별이 되어 하늘로 떠난 친구야. 나는 어린 시절 너와 함께 꿈꾸던 항공기 엔지니어나 나사과학자 같은 것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네가 공학도의 길을 걸으며 정진하는 모습에서 나의 꿈을 대리만족 했었단다. 이제는 더 이상 함께 걷거나 토론할 수 없지만, 너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순간이 나에겐 영원토록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너의 고통을 좀 더 헤아리지 못한 이 못난 친구를 용서해다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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