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 이야기를 한번 봐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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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집은 가난했었죠.
그때는 우리 집이 가난해서 힘들다는 생각보단 무서운 아버지가 더 고민이었던 시기입니다.
집에 잘 계시지 않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형들을 때렸고 어머니한테도 폭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죠.
식비로 500원만 주고 집을 나가서 안 돌아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500원으로 오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콩나물이었어요. 콩나물 500원이면 검은 봉투에 2봉지나 담아주셨거든요.
그래서 무쳐 먹고 끓여 먹고 참 많이도 먹었지요... 그래서 누나는 지금도 콩나물을 안 좋아한다고 하네요. ㅎ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자주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만을 기다리면서 살아갈 수 없었던 가족은 고등학생이었던 누나와 중학생이었던 큰형 그리고 어머니가 신문을 둘리기로 하셨어요. 돈을 많이 벌려고 하면 많이 돌려야 했기 때문에 정말 엄청 많이 돌렸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어려서 돌리진 못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작은형은 주변에 아파트만 돌리자고 저를 꼬셔서 ㅎㅎ 저는 혼자는 무서우니까 형을 따라다니기만 할 거라고 하면서 새벽에 일어났었죠. 근데 역시 형은 니가 따로 돌려야 빨리 돌린다고 아파트 동 하나를 줬었어요.
한 동에 20여 부 정도 되는 걸 무서워서 마구 뛰어다니면서 돌렸던 기억이 있네요..... 친구네 집을 지나면서 몰래 벨을 누르고 도망가볼까 하는 어린 나이에 철없는 생각도 하면서요.... 친구네 아버지가 무서워서 하진 못했지만 ㅎ
그때 잊히지 않는 기억은 신문을 거의 다 돌렸을 때 해가 뜨면서 마을에 여명이 지고 첫눈을 보았던 기억이 있어요... 정말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에요.
그렇게 새벽에 신문을 돌리고도 수입은 딱 집에 들어가는 비용 식비 주거비 정도밖에 안 나와서 용돈은 없었어요.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친구와 함께 근처에 있는 치킨집을 찾아가서 전단지를 돌리겠다고 했었죠...
많은 가게가 당연히도 ㅎㅎ 거절하셨지만 어떤 가게는 일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1부에 10원이어서 1천 부를 주시면 친구와 700부? 가량은 돌렸는데 진짜 1천 부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300부 정도는 몰래 버리기도 했습니다...
혹시 이글을 보시는 그때의 사장님이 있으시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는 정말 가난했었지만 그래도 행복했었다는 기억이 있었어요.. 콩나물을 먹던 시절보다야 ㅎ 맛있는 과자를 먹을 수 있었고 가끔 고기도 먹을 수 있었고 무서웠던 아버지가 집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뭔가 좋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중학생의 시절이 왔습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집에 거의 계셨었어요. 하지만 옛날처럼 폭력을 행사하거나 하진 않았었죠.. 소리를 좀 지르긴 했지만.. 어머니는 많이 힘드셧나봐요. 정신과에서 입원도 하시고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도 입원하시기도 했지만.. 그때 학교가 끝나고 집에 들어가기 주변을 살펴보고 아버지 차가 있으면 괜히 놀이터에서 앉아있거나 친구 집에서 놀다 들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찍 들어가도 목례만 하고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렸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아버지도 외롭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저의 자녀가 그렇게 아는 척도 안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상처받을 것 같아요…. 뭐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이렇게 중학교 시절에도 그렇게 큰일이 없이 평탄하게 지나갔었습니다... 돈이야 뭐 항상 없는 거니까...
근데 고등학교 때 좀 큰일이 일어나게 되죠... 이제 성인이 돼서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고 있는 누나와 큰형.. 그리고 이제 막 성인이 된 작은 형....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가 집에 정이 완전히 다 떨어지셨는지 사업을 한다는 사업에 실패했다는 거짓말로 어머니 누나 큰형의 이름으로 큰 빚을 지게 만들어버렸죠... 졸지에 어머니 큰 형 누나는 신용불량자로 떨어져 버렸고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집까지 보증 대출을 받아서 정말 길바닥으로 나앉아버리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잠깐 다 떨어져 있는 기간이 지나고 어머니께서 지인들에게 사정하셔서 1천만 원 정도 되는 돈을 빌려오셔서 월세방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그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누나도 직장에서 해고되고 큰 우울감에 사로잡혔으며 큰형은 집을 나가버렸죠...
작은형은 군대 문제로 인해 집에 없었고요... 채무는 정말 무섭더라고요. 그렇게 이사하고 몇 달인가 지나자 집에 모든 기물에 흔히 말하는 빨간 딱지가 붙어버렸고 세탁기? (왜 안 가져갔는지 모르겠지만)를 제외하고 모든 기물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당장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큰 대아에 물을 받아 가자고 거기다가 음식물을 넣어놓고 살았었어요.. 근데 다행히도 어머니의 친구였던 분이 몇백만원을 그냥 무상으로 주셔서 냉장고하고 공과금 집세를 지불할 수 있었죠.
저는 그런 집의 상황을 보면서 정말 철없게도 학교도 빼먹고 공원에 돌아다니거나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PC방에 가서 살고 그랬었습니다.. 정말 바보 같은 선택이죠... 공부해서 뭔가 집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못했었네요...
이런 여러 가지 안 좋은 악재가 겹쳐서 큰누나도 어머니도 건강도 많이 안 좋아지고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세·공과금은 계속 밀려버렸고 결국 처음에 지불했던 보증금조차 얼마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집은 보증금 200만 원 정도 되는 집으로 가게 되었죠 정말 그 집은 지금 생각해도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여름에는 살인적으로 더웠고 겨울엔 살인적으로 추웠고 그 시기에 군대 문제를 끝내고 돌아온 작은 형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휴가 때도 집이 멀고 차비가 없었기 때문에 집의 상황을 잘 몰랐고 어머니께서는 괜히 형이 걱정할까 봐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작은형도 집이 어렵다는 사실은 잘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 몰랐다고...
뭐 그렇게 작은형은 막노동이건 뭐건 닥치는 대로 하면서 집에 살림을 책임졌고 저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일을 시작했죠... 제가 빠른 년 생이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는 나이로 성인이 아니라 일반 직장에 취직할 수가 없었고 하루 13시간 주 6일 일하는 PC방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었죠....
처음 월급으로 밀렸던 가스세 45만 원을 지불한 게 생각나네요... ㅎ 월급 80만 원이었는데....
작은형과 제가 열심히 일을 열심히 해서 월세 공과금 식대 병원비 등등을 지불하였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참 화가 많았다고 생각해요... 친구들을 만나도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기만 했고요.
그래서 친구들도 그런 저에게 지치고 실망하고 하면서 저의 주위에서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었죠..
인간관계는 즐거움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 내가 힘든 상황을 말해봤자 어차피 도움을 받을 수는 없고 결국 다 나의 짐이 될 뿐이다.
그 시기를 뒤로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 집의 상황이나 나의 힘듦에 대해서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힘들어도 웃고 나를 만나는 사람이 나를 즐겁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믿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도움 되는 점도 참 많았어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는 원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그 순간만큼은 집도 잊고 즐겁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집에 돌아오면 즐거운 만큼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이렇게 성인이 되면서 공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참 많은 일을 했었는데요 제가 호흡기나 피부 이런 곳이 참 안 좋더라고요 노가다를 한 달인가 뛰고 나니까 온몸에 쎄멘독? 시멘트 알레르기? 로 인해서 며칠을 입원하기도 했고 (번 돈에 절반이 병원비로 가더라고요;;)
막노동이나 현장기술을 해가면서 살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이 허약해가지고..
그래서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당연히 대학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고등학교 때 공부를 논것도 있고.. 대학 입학금이며 돈을 감당할 수 있는 생각조차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어학을 공부하면 취업이 잘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영어와 일본어를 공부했었습니다.
이떄 공무원을 준비했어야 하는데.. 참 저도 멍청했어요...
여튼 아침에 일하고 공부하고 하면서 일본어는 N1 영어는 토익 800점 정도 결과를 걷어들였죠..
저의 인생에 가장 자랑할 만한 업적이랄까요? ㅎㅎ 너무 기뻣습니다..
이후 언어성적으로 인지... 그냥 저를 잘 봐주신 것인지 좋은 직장에 계약직 사원으로 2년간 일했고 2년이상 일하면 정규직 전환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래도 저를 정말 좋게 봐주셔서 재입사? 부서 계약?의 약간은 이상한 형태로 2년정도 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가 저에겐 참 좋았던? 시기였습니다.... 집에는 이제 어머니와 저밖에 없었지만 내일의 월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됬으며 돈은 모이지 않아도 다음 달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정말 오랜 만이었거든요... 어머니도 건강을 회복하셔서 소일거리를 구하다가 일을 하셧고요
하지만 나이를 먹었다는 건 미뤄뒀던 군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이떄 어머니는 장애가 있으셧고 많이 좋아는 졌지만 역시 건강도 안좋으셧고 당연히 집에 재산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저는 생계유지 곤란사유로 군대 면제를 신청했습니다.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저밖에 없었고 (작은형은 열심히 집을 도우다 자신의 삶을 살기위해 집을 떠났죠...)
그런데 정말 이 생계유지 곤란사유로 누군가가 면제를 받았다면 그 사람은 정말 어려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일단 저는 재산,월수입,어머니를 부양할 사람이 없는 조건은 모두 통과했지만.. 주변에 형제가 너무 많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큰형은 아주 일찍 집을 나가서 연락이 아에 끊긴 상태였고 누나도 당연히 집을 나갔지만 돈이 없었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작은형도 어머니를 부양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마지막 심사를 앞두고 희소식이 들려왔죠 작은형이 오랫동안 준비하던 9급 공무원에 합격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것으로 공무원이 된 작은 형이 부양하면 된다는 병무청의 판단으로 들어가게되었습니다.
다만 9급 공무원의 월급으로 자기 부인과 어머니를 부양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제가 회사다니면서 모아둔 500만원과 들어가기 전 아르바이트를 하며 벌어둔 돈을 합쳐 약 1천만원정도 되는 돈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왔죠....
어머니도 소일거리를 한다고 하시길래 가족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들어갔습니다.
다행이도 큰 문제 없이 저는 나오게되었고 어머니도 건강에 큰 문제가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늦은 나이에 나와서 취직이 잘 되지 않았죠... 뭐 어렵게 나오고 7개월 정도 뒤에 일자리를 잡았는데 그 동안 고생한게 쌓이셧는지 어머니는 암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말 슬펏죠...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것도 슬펏고 혹시 돌아가시게 되면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시는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 수술은 잘 되었고 역시 몸은 편찮으시지만 건강을 회복해 나가고 계십니다. 물론 치료비라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지만...
뭐 이렇게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마음을 가지기도 어렵더라고요..
살아가면서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지만 주변에 친구들이 결혼해서 잘 살고 작은형도 잘 사는 모습을 보면서 결혼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취업을 하고 지내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지낸 여동생을 다시 만났는데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지만 그녀의 당당하고 잘 웃는 모습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정말 가난하지만 그녀 하나는 내가 먹여 살릴 수 있다... 이제 가족말고 그녀와 함꼐 나의 가족을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그녀 주변을 맴돌며 고백을 준비했었죠...
하지만 우연치 않게 듣게된 그녀의 말은 모든 생각을 접게 만들었죠.. " 나는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아"
결국 코로나로 인해 어렵게 취업하게 된 직장에서도 해고되고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렸네요...
그 기간의 이야기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나이를 먹었고 이 세상에 필요없는 잉여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많은 후회,분노,증오를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내가 세상에 남긴 건 뭘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예전에 일할 떄 출퇴근하면서 짬짬히 웃긴글을 보러들어왔던 이 사이트에 저의 인생을 짧지만 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일생을 가식적인 웃음과 분노와 증오,후회로 살아왔지만 돌아갈때는 감사와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어렸을 떄 봤던 프로그램이 생각나네요
3명의 패널이 자신이 어렵게 살아왔던 이야기를 하는데 처음 말하는 두분은 정말 누가들어도 고생을 많이 하셧는데
세번째 분은 정말 별일 아닌 일을 엄청 고생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막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참 별일도 아니면서 울고 자빠졌네 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각자 자신이 짊어질 수 있는 짐은 다르고 그 세번째분은 처음 말했던 두분보다 나보다 더 힘들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각자에 짐을 지고 어렵게 살아가는 시대에입니다. 나보다 상대가 더 힘들수 있다고 생각하며 서로 배려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모든 분들도 힘내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긴 글을 읽어주실 분이 얼마나 되실지 모르겠지만 읽어주셧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그냥 어떤 남자가 이런 인생을 살았구나 하면서 만화나 영화의 캐릭터 보듯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을 아주 짧지만 이렇게 글로 적으니 뭔가 정리도 되고 추억에 잠기게 됩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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